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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정원 summer garden Oct 22. 2024

1.0 잘 자고 있니? (1/2)

1부 여름이나





말이 중요할까 행동이 더 중요할까?


내 짝꿍 이나는 확고한 ‘행동중시파’다. 사람의 마음은 본디 갈대 같아서 수시로 변하는데, 한 치 앞도 모르는 자가 미래를 약속해 봤자 허망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당초부터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마음과 의지란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과연, 이나다운 주장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자를 곁에 두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세간에는 입만 살았다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행함 없는 자의 삶이란 죽은 것과 진배없다는 얘기다.


‘행동중시파’의 가장 큰 약점은 사람이 행동만으로 타인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에 있다. 추측은 오해를 부른다. 가령 저 여인이 툭하면 날 보고 웃는 게 내가 좋아서인지, 그저 웃음이 많아서인지, 무슨 재주로 알아차리겠는가? 행동뿐인 세상에서는 관심법(觀心法)이 필수 소양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자기 의사를 명확하게 언어로 표현하는 연습을 하기보단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약속을 만들기로 결정한 듯하다. 직접 상대에게 물으면 훨씬 간단할 것을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 하고 인터넷에 묻는다. 불특정 다수가 새로운 사회적 약속을 만들어주길 기대한다. 기표와 기의를 짝지어 기호를 만드는 것처럼 'A라는 행동은 P를 의미합니다'하며 많은 행위에 암묵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일단 인터넷상에 논제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그 영향권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깻잎 하나 떼어주는 걸로 나라가 반반 나뉘어졌을 때, 많은 이들은 '그럴 수 있다', '그러면 안 된다'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도록 강권 받았다. 유행을 가장한 하나의 정치 투표가 아닌가 싶다. 결국 어느 선택지가 제1당을 차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논제를 다룰 때 소수당의 입장이 경시되는 건 확실해보인다.


무튼, 나에게 대화는 무척 중요하다. 글을 읽고 쓰는 걸 사랑하는 사람이 언어에 민감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말이든 글이든 하나는 창구가 열려야 한다. 입 꾹 다물고 제 할 일만 묵묵히 하는 사람과 한평생을 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갑갑하다(참고로 이나는 ‘행동중시파’지만 나보다 훨씬 말이 많다). 저놈의 입은 먹을 줄이나 알지, 그렇게 한숨 한 번에 주름 하나씩 늘어갈 게 눈에 훤하다. 말을 안 하면 아무것도 모른다. 깻잎 한 장에 얼마나 지고지순한 사랑이 담겼는지도 서로 대화해 온 사이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행일치파’를 주창한다. 말도 알맞게 하고, 행동도 잘 해야 한다. 가진 건 알뜰살뜰 다 써먹을 예정이다.






그런데 행동중시파든 언행일치파든 선행해야 하는 작업이 있다. 바로 ‘이해’의 작업이다. ‘이해’의 필요성은 짧은 우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소와 사자의 사랑 이야기인데,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소와 사자가 사랑에 빠졌다. 소는 매일 맛있는 풀을 사자에게 가져다주었고, 사자는 매일 신선한 살코기를 소에게 가져다주었다. 소는 살코기를 먹는 게 괴로웠으나 사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참았다. 이는 사자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는 법. 결국 둘은 다투었고, 끝내 헤어졌다. 그들이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한 말은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었다.


이 짧은 우화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신구 선생님이었으면 소에게 이렇게 물었을 거다. “아니 저 양반 매일 눈에 불을 켜고 사냥만 하는데, 정말 고기 좋아하는지 몰랐습니까? 풀 먹고 토하러 가는 거 몰랐습니까? 사자도 대답하세요. 소가 고기 틈에서 풀만 골라 먹는 거 몰랐습니까? 물어볼 생각이 안 들었습니까? 두 분 그동안 도대체 뭘 보고 사신 겁니까? 4주고 자시고 그냥 바로 쫑내세요.” 상대가 원치 않는 걸 계속 드밀면서 “사랑해서 그랬다” 하는 게 언제부터 로맨스였느냔 말이다.


카운셀러인 게리 채프먼 작가는 ⟪5가지 사랑의 언어⟫에서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사랑의 언어’(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는 나의 사랑의 언어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 가령 ‘함께 하는 시간’이 사랑의 언어인 사람에게 아무리 ‘선물’을 가져다주어 봐야 마음 깊이 사랑을 느끼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해’다. 상대의 영혼 깊숙이까지 샅샅이 파악해서 ‘너는 나, 나는 너’의 상태를 만드는 거창한 작업이 아니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도만 알아도 많은 갈등을 예방할 수 있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인간관계는 이 작업을 안 해서 끝난다. 안다고 착각하거나, 알아야 하는 줄 모르거나, 아니면 알고도 게으르거나.


인간이라는 종(種)은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곧잘 안일해지는 특성이 있다.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일 중의 하나가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닫고 후회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심지어 그 깨달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마든지 희미해질 수 있다. 그러니 인간관계가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상대를 탐구해야 하고, 자기 생각과 감정을 말로 전해야 하고, 그 진심을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사람은 매 순간 변화하는 존재이므로 이 과정에는 끝이 없다. 게다가 처음부터 모든 일에 능통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부족한 존재들끼리 삐거덕거리며 상처 입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소중한 관계는 혈연, 시간, 돈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생에 걸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어렵고 까다로운 작업이다. 날로 먹을 생각일랑 버려야 한다.





***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내가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고, 세계도 모르던 때의 일이다. 20대 초반의 나는 현재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뒤틀리고 울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호기심은 내 영혼의 강력한 재료 중 하나였고, 위태로운 생명력을 가까스로 지탱하는 연료로 작용했다. 광범위한 무지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의무감 그리고 호기심이 합쳐지자 ‘연애라는 거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나?’라는 허튼 생각이 탄생했다. 나는 곧장 미팅에 나가서 가장 맘에 드는 사람의 번호를 땄다. 자고로 이성애자 여성은 겁대가리 없고 객기를 갖춰야 한국 사회에서 연애할 수 있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데이트를 신청하고, 세 번째 만남에서 고백까지 속전속결로 해치웠다. ‘일단 만나봐, 만나 보고 아님 마는 거지 뭐.’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했다. 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게 그렇게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2/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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