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정원 summer garden Oct 22. 2024

0.0 서른은 어떤 나이입니까? (2/2)

들어가며





1인분의 기준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언제든 SNS에 들어가면 사람을 분류하고 규격화하는 글이 가득하다. 「20대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 「이런 사람은 걸러야 한다」 「오래 만나는 커플들 특징」 「성공하는 사람의 10가지 습관」 등등. 누가 상정한 건지 알 수 없는 기준이 평균값인 양 돌아다니며 규격화될 것을 재촉한다. 바야흐로 맥락 없는 아포리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아니, 이 자식들 이거, 누구 허락받고 나한테 이런 걸 보내는 거야!” 남자 친구 이나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분노하며 ‘관심 없음’ 버튼을 누른다. 나는 그의 분노가 흥미롭다. 이나는 사회가 바라는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능력치를 가진 사람이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비주류적 삶과 사고방식에 새삼 놀라곤 했다. 그럼에도 이나는 정형화된 삶을 벗어나 새로운 도전에 매진하고, 언론과 미디어가 앞장서 판매하는 ‘평균의 환상’에 진저리를 친다.


‘평균의 환상’은 사회가 규정하는 평균값에 도달하면 불안이 해소되고 행복해질 거라는 허황한 믿음을 의미한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내부에서 찾지 못하고 외부에서 찾고자 할 때 발생하며, 성적, 돈, 외모 같은 가시적이고 수치화할 수 있는 지표가 ‘평균값’을 형성한다. 평균의 환상은 시험 성적이 학생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고 믿게 한다. 연봉이 개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해준다고 설득한다. 평균의 환상을 따를 때 사회는 개념적으로 계급화된다.


문제는 가정과 학교, 언론, 인터넷이 단합하여 평균의 환상을 판매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된 삶이 보장하는 안전이 없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평균의 환상을 수용한 기성세대는 기꺼이 그 올무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다. 계급화된 사회의 꼭대기로 향하는 것 외에는 불안을 종식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행복을 보장하며 평균의 환상을 판매하는 이들의 손에도 행복은 없다. 애석한 일이다. 행복의 핵심인 다정함의 필요를 증명하는 일에 전(全) 사회가 게을렀으므로, 기성세대는 계급과 불안만을 대물림하게 되었다.






나와 이나는 평균의 환상 장사가 망해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뉴스를 보면 시장은 여전히 성황이다. 개인의 가치를 스스로 긍정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공허, 우울, 분노가 성행한다. 보건복지부는 2024년 5월까지의 자살 사망자 수가 6,375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0.1%가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통계청은 2024년 7월 고용동향 자료를 통해 구직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쉬었다’는 15~29세 청년이 44만 3,000명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44만은 서울시 양천구의 인구수(43.4만)와 비슷한 수치다. 경북에서는 구미시(40.5만)의 인구수, 전남에서는 여수시(27만)와 목포시(21.2만)의 인구수를 더한 값과 비슷하다. 강원도로 가면 원주시(36.1만)와 동해시(8.9만)의 인구수를 더하면 되고, 충남에서는 아산시(35.2만)와 보령시(9.4만)의 인구수를 더하면 유사한 값이 나온다. 나는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한국에서 행복한 사람의 수를 합치면 어느 도시의 인구수와 비슷할까. 어떻게 해도 서울공화국의 인구수를 채우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학원에서 학생들이 만드는 이야기에는 자살을 선택하는 인물이 흔하게 등장한다. 그건 내가 고등학생일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를 비롯한 많은 친구가 허구의 세계에서 자살하는 인물을 만들었다. 학생들이 어리기 때문에 죽음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걸까? 10대이기 때문에 죽음에 더 매료되는 걸까? 아니다. 우리는 ‘한국의 10대’이기 때문에 자살에 친숙한 것뿐이다. 인포에 앉아서 지나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핀란드 학생이 쓴 글이 읽고 싶어진다. 비현실적으로 휘청거리다가 죽어버리는 인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하이얗고 고요한 세계가 그리워진다. 가본 적 없는 땅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괜스레 눈동자를 깊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 있다.


그래서 결단코 다수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나의 비주류 인생을 세상에 꺼내놓기로 했다. 44만 3천 명의 사람들보다 일찍이 ‘쉬었음’ 상태로 오래 지냈던 내가 ‘가까스로 1인분’을 하기까지의 여정을 말하기로 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단 한 번도 사회가 규정하는 1인분을 위해 살지 않았다. 그럴 재주도 없었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1인분’을 위해 살았다. 누구나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학원 인포에 앉아서 10대들을 보고 있자면 내 사고의 편협함을 절감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1인분으로 타인의 1인분을 재단하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30대의 미숙 씨가 서른의 나를 보는 눈빛을 상상하고 상처받으면서도, 왜 나는 타인을 향한 판단을 멈추지 못하는가.


그리하여 이 글은 두 가지 목표를 가진다. 첫째, 주류 사회를 이탈하여 자랐으나 무탈히 잘 지내고 있는 95년생 여름 씨의 삶을 그려내는 것. 둘째, 책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 타인의 다양한 삶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는 것. 다 떨어진 두루마리 휴지가 스스로 교체되지 않는 것처럼, 수용과 다정함의 세계는 우리 손으로 직접 이룩해야 한다. 그러니 우선 당신은, 나의 삶을 들어두는 편이 좋겠다.







* '평균의 환상'은 여름이 이름 붙인 개념이다.

이전 01화 0.0 서른은 어떤 나이입니까? (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