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나, 응원하기

by 구천개의 생각


<나를 지키는 7가지 문장>



내가 존경하는 ○○도 날 사랑하는데, 네가 뭔데? 누구도 날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남들보다 먼저 뛰어든 사회생활은 태어난 지 20년도 안 된 나에게 참 험난했다. 20년이란 기간은 무척 길어 보이지만, 사실 그중 반은 혼자서 바깥에 나갈 수조차 없는 아기 캥거루 같은 존재였고, 나머지 반은 나와 똑같은 아기 캥거루들과 맨날 붙어 앉아 공부하고 놀러만 다녔으니 험한 세상을 완벽히 대비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는 세상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낯선 일들을 대처하기엔 너무나 어리숙했고, 그 어리숙함을 이용해 본인 마음 편하자고 막말을 하거나 부당하게 행동하는 어른들도 수두룩했다. 그로 인해 내 잘못이 아닌 일도 내 잘못인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잦아졌고, 다시 바깥으로 나갈 때마다 위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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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느 날부터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날 잡아먹게 두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나를 격려할 수단으로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써먹기 시작했다.


방법은 이런 식이다. 바깥에 나갈 때는 꼭 신발을 신으니 그때마다 이런 말을 되뇌이는 것이다.


"그 대단한 우리 엄마도 날 한 번도 안 때리고 곱게 키웠는데, 네가 뭔데? 이렇게 귀하게 자란 나를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또는 상대방의 사랑이 불확실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그 위대한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데, 네가 뭔데? 누구도 날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나는 이(李)씨도 아니고 장군님이 날 사랑했을지 그 여부도 미지수지만, 같은 한반도에 살았고 백성을 널리 사랑하신 분이니 그냥 나도 사랑하셨으리라 믿으며 계속 되뇌었다.


어떻게 보면 부와 권력에 취해 진상 부리는 사람이 하는 말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가진 거 없는 놈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일 뿐이었으니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진 않았다.


그리고 효과도 좋았다. 말이란 참 신기한 게 계속 뱉다 보니 진짜처럼 느껴져서, 모든 일이 내 잘못 같았던 구박덩어리 '나'에서 귀하게 자란 '나'로 달리 생각하니 주눅 들었던 마음도 빠르게 나아졌다.





밥 먹을 때 혀를 깨무는 건 네가 아무리 경험이 많더라도 실수할 수 있다는 완벽한 예시이다


이건 'ShowerThoughts'라는 사이트에서 사용자 'kioshi43'이 했던 말로, 원문은 이렇다.


"Biting your tongue while eating is a perfect example of how you can still screw up, even with decades of experience."


우리나라의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이걸 번역해 올려주어 처음 접했었는데, 참 오랫동안 날 위로해주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을 지나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에도 진짜 내 실수로 인해 문제가 생길 때면 대책 없이 자책감에 빠지곤 했는데, 그럴 때 저 문장을 눈으로 보거나 머릿속에 떠올리면 금세 상태가 회복됐다.


물론 잘못한 일에는 미안한 줄 알아야 한다. 나도 그런 걸 모른 척하는 책임감 없고 뻔뻔한 인간이 되긴 싫다. 하지만 그 잘못의 정도와 상관없이 과하게 땅굴을 파고 들어가게 된다면, 이런 류의 합리화는 조금 허용되어도 괜찮지 않나 싶다.


"이(치아)는 음식 씹는 걸 수천 번, 수만 번 했어도 가끔 음식을 못 찾고 혀를 씹어버리는데, 음식을 씹는 것보다 덜 해본 일을 실수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닐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일을 잘하면 사람은 따라온다


요즘은 천직(天職)이랄 게 따로 없는 것 같다. 우리네 부모님들께서는 한 직업을 가지면 10~20년 간 책임감 있게, 끈기 있게 잘하셨던 것 같은데, 나는 한 회사를 고작 2년만 다녀도 일이든 사람이든 무언가에 질려서 그만두게 되었다.


내가 벼락부자가 되어 그만둔 건 아니었으니 퇴사는 또 다른 입사로 이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환경을,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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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첫인상에 호감을 끄는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오래 알면 사랑스러운 인물도 아니다. 입 바른말만 하고 취향도 비주류인 나는 뭘 해도 마냥 예쁘고 사랑스러운 인물은 못 되었다.


그런 주제에 미움받는 건 싫어했다. 무심한 말을 내뱉는 건 잘만 하면서도 남의 무심한 말에는 상처를 잘 받아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미움을 살까 조마조마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을 접할 때마다 긴장하곤 했다.


근데 오랜 기간 보고 듣고 직접 경험하며 알게 된 것이 있다. 바로 '사람들은 내 할 일 하고 있으면 알아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처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날이나, 아직 만나지도 않은 그 전 날 저녁부터 "거기서 미움 사면 어떡하지?" 하고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들면 "맡은 일이나 잘하자"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단체에 들어가 학교 다닐 때도 안 한 모범생 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자연스레 다가왔다. 이런 모습은 '진짜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거나, '일은 못 해도 늘 성의 있게 노력하는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말이 모두 옳은 말은 아니다


나는 지는 걸 싫어한다. 매사에 승부욕 넘치는 타입은 아니지만 싸움으로 판단 내린 상황에서는 지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공들여 대비한다.


그 대비 태세 중 하나는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언행을 조심하는 건데, 이게 일회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긴 시간동안 신경 써서 하는 거다 보니 어느새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평소에도 내가 '객관적으로 틀린 말을 하고 있진 않은지' 강박적으로 신경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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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땐 그 증상이 심층적으로 발전했다. 내가 옳지 않은 소재를 고른 것은 아닐까? 내가 옳지 않은 편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돌아봤을 때 틀렸다면? 이런 말을 내뱉은 걸 창피해하지 않을까?


이런 지레짐작이 나의 주된 고민이 되었을 때쯤,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라는 책을 읽었다. 외국인 저자가 쓴 글이라 서양사 위주이긴 했지만 여성사가 포함된 세계사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이었다.


이 책에는 수없이 많은, '오래된 말'을 근거로 들어 여성들의 삶을 핍박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 살던 사람이든 간에 이런 식의 말을 했다.


"여성은 나쁜 길로 유혹하는 존재이자, 그 스스로 유혹에 약한 존재"

"여성은 이성적이거나 똑똑하지 못해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없는 존재"

(주로 종교 서적을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해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 써먹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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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게 사실인가? 일리 있는 말인가?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적 시선을 이겨내느라 최소 2배 이상의 노력을 하며 본인의 인생을 바쳐 그게 틀린 말이라는 것을 증명해왔다.


그러니 선조들도 우리보다 지구에 먼저 태어났을 뿐 모두 지혜롭고 옳은 말만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들도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들처럼 헛소리를 하고 살았다. 그때 헛소리였던 것이 지금 와서 맞을 수도, 그때 정설이었던 것이 지금 와서 헛소리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라고 꼭 옳은 말을 해야 할까?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의견을 숨기고, 아끼고, 함구해야 할까?


이렇게 생각하자 틀릴지도 모를 말을 내뱉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아졌다. 내가 오늘날 하는 말이 설령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 여부는 더 나아진 미래에서 판단할 일이니까.


나는 내 의견을 미리 검열하고, 함구할 필요가 없다.





적응하는 건 남의 일이다


나는 머리카락이 많다. 그리고 굵다. 어릴 적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고 엄마가 "머리카락 빠지면 주우라니까"하고 한마디 하면, 내 머리카락 아니라고 잡아떼다가 엄마 머리카락과 비교해 보여주면 그제야 내 것임을 인정하고 머쓱하게 웃는 게 일상이었다.


게다가 이 놈의 머리카락은 빨리 자랐다. 누군가는 축복받은 유전자라고 부러워했지만, 나는 당사자여서 그런지 몰라도 늘 귀찮고, 무겁고, 답답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긴 머리를 고수했다. 반곱슬인 주제에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마음대로 뻗치는 버릇없는 녀석은 아니어서 대충 감고 대충 말려도 그럴듯한 모양새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딱히 정성스레 관리하지도 않는 머리가 귀찮았던 나는 숏컷으로 자를까 수백 번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늘 "안 어울리면 어쩌지?"라는 생각과 함께 찾아와 결국 실행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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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몇 년 전, 머리를 아주 짧게 잘랐다. 귀 바로 위까지만 내려오는 짧은 기장에, 뒷머리는 이발기로 밀어낸 후 눈썹 칼로 싹싹 깎아 없앴다. 전에 느껴본 적 없던 시원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신 장발로 돌아가지 않았다. 작년 여름엔 삭발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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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스타일뿐만 아니라 외모에 변화를 주고 싶을 때면, 늘 바늘과 실처럼 "이게 나에게 어울릴까?"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그것에 긍정적인 답변이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를 망설이게 하는 부정적인 답변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그로 인해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하고 상태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편하거나 더 좋을 것임을 알아도,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지금의 상태도 괜찮다고, 오히려 더 낫다고 합리화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나의 경우에는 몸에 열이 많아 긴 머리가 덥고 답답했는데도, "그래도 애매하게 자르는 것보단 길러서 묶는 게 낫지"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짧게 자르는 선택지를 애써 외면했다. 사실 목에 머리카락이 닿지 않을 정도로 묶으면 두피가 무지 아팠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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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게 나에게 어울릴까?"라는 고민은 사실 내가 할 일이 아니다. 하루 중 내 겉모습을 더 많이 보는 사람은 내가 아닌 남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 그대로 24시간 내내 거울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나와 마주 앉아 대화하고 나를 스쳐 지나가는 남들이 나를 더 많이 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모양새를 무시하거나 신경 쓰거나 적응하거나 못 견뎌하거나 하는 것은, 누가 할 일일까? 나일까, 남일까?


어쩌면 그동안 나는 남이 해야 할 고민을 대신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고민은 남에게 미루고, 그냥 나에게 편할 걸 선택하자.





그럴 수도 있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말'이란 참 신기하다. 계속 뱉다 보면 진짜 그렇게 되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


나는 사실 지금 소개하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내 관념과 다른 일에 순순히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의 오랜 친구 중 한 명은 이 말을 정말 잘 썼는데, 난 어릴 적부터 그 친구가 정말 부러웠다. 나도 그 친구처럼 쿨하게 남들을 이해하고, 그러려니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수년간 그것을 체화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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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비교적 최근, 좋아하는 아이돌이 이 말을 자주 쓰기에 나도 종종 따라 하게 되었다. 처음엔 그냥 몇 번 흉내만 내는 수준이었는데, 어느새 입에 붙어 일상 속 많은 경우에 그렇게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내가 어릴 적 부러워했던 친구의 모습처럼 남들의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 친구가 오랜만에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하는 날 보고 "정말 유해졌다"고 평할 정도였다.


한결 유해 보이는 외적 이미지의 변화보다 더 좋았던 것은 이해 못할 인간을 만나도 "그래, 그러고 살아라" 하고 머리에 담아두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은 그런 인간이 내 인생에 나타나면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계속 생각나 열불 났었는데, 이제는 그런 인간이 내 뇌에 잠시 방문해도 "그대로 나가시면 돼요~"하고 내보내는 게 가능해졌으니 내 스스로 더 행복해진 것이다.


정말이지, 만병통치약 같은 말이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상황에서 도움 될 것이다.





One Step At a Time


"한 번에 한 단계(한 개의 일)만"이란 의미의 이 문장은 포스트잇에 적어 책상 근처에 붙여둔 말이다.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책상 가까이에 이 말을 붙여둔 이유는 이것의 존재가 상비약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일이 동시에 몰렸을 때, 그것의 우선순위를 빠르게 정리하지 못한다. 커다란 눈덩이가 내리막길에 서있던 '할 일'들을 붙이고 빠른 속도로 굴러오는 느낌이라서 그 순간 자체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럴 때면 고개를 돌려 바로 저 메모를 본다. 이 문장은 진정제 역할을 해 순식간에 날 안정시킨다. 너무 다급해서 할 일 목록을 만들 생각조차 못했던 나에게 그것부터 정리할 여유를 주고, 차근차근 무엇부터 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을 부여해준다.


그러니 이 문장은 이렇게 정신없을 때나 침착해질 필요가 있을 때 시각적으로 복용할 수 있는 약이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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