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나, 사랑하기

by 구천개의 생각


나의 장기적인 발전에 기여하는 의미 있는 활동으로, 나에게 경제적 여유를 주는 직장 일로, 그 외의 내가 흥미를 가지는 여러 취미들로 하루를 꽉 채워 살다 보면, 높은 성취감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한 주를 채우고, 한 달을 채우다 보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는 뿌듯함에 마구 들뜨기도 한다.


그런데 행복은 무한대로 이어지지 않고, 갑작스럽게 사라지기도 한다. 이대로 쭉 잘 될 것만 같다가도 꼭 한 번씩 일상이 바스스 무너져내려 다시는 그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처럼 게으르고 무기력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럴 때 나에게 탓하는 소리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건 내가 게으르고 의지 없는 인간이어서가 아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매너리즘으로 인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나는 그저 휴식이 필요한 보통의 인간일 뿐, 절대 무능하고 한심한 인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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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씩 TV에 중계되는 마라톤 경기를 보다 보면 마라토너들이 한참 뛰다 만나는 것이 있다. 바로 물병이 우르르 놓여져 있는 테이블이다. 선수들은 뚜껑이 열려있는 물병을 낚아채 바로 마시기도 하고, 온몸에 뿌려 열을 식히기도 한다.


나는 당장 그들처럼 42.195km를 뛰는 대단한 사람이 될 순 없지만 오직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긴 여정을 떠난다는 점에서 나의 인생과 그들의 경기를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지 않을까 감히 바라본다.


만약 그런 비유가 허락된다면, 내 인생을 마라톤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내가 만나는 물병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의 뜨거운 몸을 식히고, 무엇이 나에게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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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접했던 미디어에서는 오직 이성 간의 사랑만을 다루어 이야기했다. 마치 다른 형태의 사랑은 없는 것처럼, 있더라도 그것에는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오직 연인에게만 향하진 않았다. 나는 헤테로 성향을 가지고 있어 이따금씩 이성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한때는 함께 살던 고양이에게 그 애정을 쏟았고, 한때는 갓 태어난 조카에게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으며, 한때는 특정 야구장을 죽도록 흠모하고, 또 한때는 한 지역을 떠올리기만 해도 울렁일 정도로 사랑했다.


미디어는 나에게 한정된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었지만, 나는 자라면서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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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존재는 나의 보살핌과 애정을 기반으로 삶을 영위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나에게 편안한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나 또한 그들에게 중요한 존재였겠지만, 나에겐 그들이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겐 이런 존재가 꼭 필요하다. 단 한 가지라도 내가 힘들 때, 지칠 때, 무너질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 자리엔 연인이 있을 수도, 친구가 있을 수도, 반려동물을 포함한 가족이 있을 수도 있고, 특정 장소나 시간, 또는 물건이나 음악이 있을 수도 있다. 그냥 내가 조건 없이 사랑을 쏟아도 아깝지 않은 존재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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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간혹, 사랑은 존경심을 함께 동반하기도 한다. 그 존재 자체에 그저 사랑스러움만을 느끼다가도, 그 존재의 행동과 말, 업적, 사상, 신념, 그리고 가끔 무생물인 경우엔 그 모양새에도 경외심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존재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로부터 자극과 영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동경하는 존재가 먼저 솔선수범하거나 위대한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다니, 아마 그 정도면 꽉 찬 일상에 지쳐 아무것도 못하던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기엔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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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모두가 고통받는 판데믹 시대에 나는 이런 존재를 접할 매개체로 '영상'을 택했다. 내 눈에 한 번에 담을 수 없는 웅장한 장소에도 직접 갈 수도, 너무나 존경해 손 한 번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인물도 직접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인물은 코로나가 아니어도 못 만났을 것이다.)


영상을 통해 자극받는 경험은 어느 날 새벽에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오전 5시에 집 근처 저수지에 나가 산책로를 걸을 생각이었는데, 늘 그렇듯 운동하러 나가는 게 쉽진 않았고, 결국 의자에 앉아 마냥 "나가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하며 시간만 보내다가 우연히 최근 많이 좋아하게 된 여자배구선수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가 경기에서 수많은 활약을 하고, 중요한 플레이를 해낼 때마다 포효하는 모습은 나까지도 에너지를 들끓게 만들어 당장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또 한 번은 스터디 카페에 가기로 마음먹었다가 이유 모를 무기력으로 인해 나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불편하게 아무것도 안 하느니 마음 놓고 쉬자'는 생각으로 좋아하는 아이돌의 직캠 영상을 틀었다가 "저런 재능 넘치는 친구도 저 무대를 만들기까지 수없이 노력했을 텐데..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하는 마음이 들어 또 당장 튀어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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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평소 일상이 흐트러진 것 같으면 미라클 모닝을 실천하는 브이로그나 관련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공부에 집중하고 싶으면 GSWM(Get Study With Me)나 학생 브이로그를, 일적으로 자극받고 싶으면 내가 목표하는 직업의 브이로그를 보곤 한다.


신나고 싶을 땐 크고 활발한 음악을, 차분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땐 잔잔한 음악이나 백색소음류를 찾아 듣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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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대회의 스탭들이 열심히 달려오고 있을 마라토너들을 위해 시원한 생수를 준비하고, 그들이 지나가다 낚아채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뚜껑을 열어 진열해 두는 것처럼, 나 또한 계속 달리다가 매너리즘에 빠질 '나'를 위해 휴식처가 될 사랑하는 존재와 자극과 영감을 줄 존재, 그리고 그것을 만날 수 있는 경로를 준비해두어야 한다. 위험에 대비하는 것 또한 '나'를 돌보는 나의 책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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