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나, 시작하기

by 구천개의 생각


앞서 <나, 방항잡기> 편에서 나의 진정한 관심사를 찾아냈다. 이것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지만, 이것은 아직 '대분류'에 속하는 정보일 뿐이다. 당장 오늘 하루에 바로 집어넣기엔 그 안에 포함된 방향도 항목도 가지각색이고, 너무나 포괄적이란 뜻이다.


계획을 세울 때는 막연히 뭉뚱그려진 모양새가 아닌 그것을 조각조각 나누어 세부적으로 세우라고들 한다. 그러니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중분류, 소분류로 나누어 본다. 큰 목표를 중간 목표로, 중간 목표를 다시 세부 목표로 촘촘히 나눈다.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이니 할 일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정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금세 그럴듯한 계획표가 만들어질 것이고, "이제 시작!"이라는 당찬 기세를 몰아 온 몸으로 부딪힌다.


하지만 작심삼일이라고,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듯 의욕적이지만, 셋째 날에 다다르면 이 계획표에 반박할 거리가 수 십 가지 생긴다. 계획표를 만들어 시킨 사람도 나, 그것을 실무 처리하는 사람도 나인데, 그 의견 차이는 실제 고용주와 노조처럼 극과 극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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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날, 이런 류의 실패가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싶어졌다.


10대 시절의 공교육과 대학 교육을 벗어나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나의 오랜 관심사였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그동안 관련 정보도 많이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그렇게 조금씩 정보를 모으며 수년을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생 초보자가 아닌 반(半) 전문가쯤으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애매한 위치에서 시작했다면 높은 확률로 "조금만 배우면 금방 잘하겠는데?"라는 안일한 생각이 함께 따라왔을 것이다.


나 자신을 '그 분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탄탄한 기본 지식 정도는 갖춘 사람', '금방 전문가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라고 건방진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운 좋게 내가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라 기대한 만큼 빠르게 발전한다면 축하해 마땅할 일이지만, 선천적 재능이란 그렇게 쉽게 따라오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나는, 전문가는 커녕 기대했던 반(半)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그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 평소에 관련 정보를 남들보다 눈여겨본 사람만 되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 그 정보들이 잠재적으로 들어있고, 어디 가서든 그것에 대해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실상 그 정도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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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라면 나 자신이 '허접'이라는 사실을 빠르게 인정해야 한다. 사전에서 표현하듯 '질이 낮고 잡스러운 인간'이 아니라, '기대한 것에 비해 실력이 낮은 인간'이란 뜻으로 말이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면, 아마 중간부터 시작할 순 없을 것이다. 금방 배울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도, 이 허접한 이가 지금 반(半) 전문가쯤 되었다는 착각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계획 세울 때에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분량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조이 역을 맡은 에이미 포엘러는 이런 말을 했다.


"We say things to ourselves that we'll never say to our friends. Give yourself a break."


"우리는 친구들에겐 절대 하지 않을 말을 스스로에겐 하죠. 자신에게 더 관대해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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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에서 '말하는 것'을 '시키는 것/가르치는 것'으로 대체해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소중한 친구가 나의 전문 분야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한다면 "뭐 실력 점검은 됐고, 앞으로 2주 동안 난이도와 상관없이 무조건 하루에 2 챕터씩 끝내."라고 할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이 만나서 기초 용어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잘 모르겠다 하면 "맞아, 이게 처음엔 어려워. 나도 그랬어."라고 독려해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를 가르칠 땐 저런 관대함이 사라진다. 내가 저렇게 다정한 사람이 못 되는 인물도 아닌데, 유독 나 자신에게만 각박하게 굴게 된다.


하지만 아기가 첫걸음마를 떼는 게 어렵듯, 어른인 나도 무언가를 처음 도전할 땐 모든 게 어렵고 서투르다. 그리고 아기가 한번 걷기 시작하면 금방 뛸 수 있듯이, 어른인 나도 하나를 잘 배우고 나면 그다음 단계는 훨씬 빠르게 해낼 수 있다. 그게 무엇이든 실력이 '가속화'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가르칠 때에도, 처음부터 알맞지 않은 할당량을 쥐어주고 왜 못하느냐 다그칠 필요 없이 수준에 맞는 분량을 먼저 부여해 주어야 한다. 오늘의 내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미래의 더 나은 내가 더 빠르게 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로 스스로를 자책하고, 주눅 들어 있기보다, "내가 허접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냥 쭉쭉 나아가는 것이 더 낫다.





시간


이번 연도 봄, 10년 가까이 쓴 노트북을 호상(好喪)으로 보내주고, 새 데스크탑 PC를 구매했다. 컴퓨터에 대해서 아는 건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로 조립형 PC가 사고 싶어진 나는 이리저리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컴퓨터 사양에 적혀있는 저장용량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저장용량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PC를 사용하는 데는 Windows 등의 OS를 설치가 꼭 필요하니, 그것의 용량을 제외한 나머지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용량이라는 의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OS가 어딘가 다른 곳에 자리를 빌려 설치되는 것도 아니고, 내 PC에 설치되니 그 용량을 차지하는 게 당연한데···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참 우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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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용량도 판매 페이지에 적힌 게 다 내 것인 줄 알았던 나는 '시간'도 나기만 하면 다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계획을 짤 때든 회사에 쓰는 기본 근무시간과 통근시간, 씻고 이것저것 준비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이후에 남는 4~5시간이 온전한 가용시간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과거의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 나의 '체력'이라는 OS가 이미 그 시간 중 일부를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계산상으로는 5시간이 주어졌지만 사실 그중 한두 시간은 식사와 휴식하는 것에 당연하게 써야 했는데, 과거의 나는 그런 여유를 전혀 가지지 않고 무조건 4시간이면 4시간, 5시간이면 5시간 꽉 채워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매일 퇴근길은 이런 식이었다. 머리는 몸에게 "모자란 놈, 의지 없는 놈, 있는 시간도 쓸 줄 모르는 놈"이라며 욕을 쏟아붓고, 몸은 머리에게 "융통성 없는 꼰대"라고 반박하는 식, 집에 다 도착하도록 계속 싸우기만 해서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을 보내버리는 식···


더욱 안타까운 점은 사회에서 보통 꼰대가 권력을 가지고 있듯이 내 본체에서도 머리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나도 머리와 의견을 함께 해야 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머리와 편을 먹고 내 몸에게 모자란 놈, 의지 없는 놈, 있는 시간도 쓸 줄 모르는 놈이라고 욕만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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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는 몸에게 미안한 줄 안다. 충전해준 에너지도 없는 주제에 게으르고 의지 없는 놈이라고 욕만 해대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위의 시행착오를 발판 삼아, 요즘은 목표한 계획에 쓸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여유롭게 잡는다. 가끔은 과할 정도로 많은 여유를 주는데, 그게 나쁘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남이 기간을 정해준 일이라면 그것에 맞출 필요가 있겠지만, 주관도 내가 하고 참여도 내가 하고 있는 계획이라면, 굳이 그렇게 급할 필요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계산상으로 나온 가용 시간은 '실제로 쓸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은, 애초에 그런 의미의 시간에 '가용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안 됐다. 나는 그저 그것이 내가 온전히 쓸 수 있는 시간이라고 착각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지속성



나는 어릴 때 무언가를 사랑해도 그 애정이 1년에 미치지 못했다. 어떤 취미를 가져도 짧은 기간 내에 흥미를 잃었고, 끝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슨 감정이든 폭발하듯 터지는 편이었던 나는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도 늘 열렬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늘 에너지가 필요했으니, 결국 열렬한 사랑 표현은 열렬한 에너지 소모로 치환되었다.


무슨 일이든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나는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늘 포기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오랫동안 좋아하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도전하지도 못하고···


재미로 성격 테스트 같은 걸 할 때, '나는 끈기 있는 사람이다'라는 식의 문항이 있으면 난 무조건 최하위의 선택지를 찍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전혀 아니다, 또는 0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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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최근, 우쿨렐레를 샀다. 즐겨보던 미드에서 한 배우가 호텔 발코니에 앉아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장면이 내 마음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악기라곤 피아노뿐이었는데 갑자기 현악기라니··· 오래 망설여졌지만 나의 첫 우쿨렐레를 찾아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파인애플이 그려진 예쁜 우쿨렐레는 빠르게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요즘은 영상 컨텐츠가 잘 만들어져 있으니 독학하기에도 충분했고, 구매 전 먼저 찾아봤을 때 난이도도 적당해 보였기 때문에 도착한 날부터 아주 희망찬 상태로 매일 연습했다.


하지만 기대한 것과 달리 연습을 해도, 해도 실력이 나아지지 않았고, 스트링을 누르는 손만 아팠다. 손톱 물어뜯는 습관 때문에 손톱도 없어 스트로크를 직접 칠 수도 없는 것도 답답했다.


결국 나는 다시금 '포기하는 인간'이 되었다. 얼마간 매일 연습하던 우쿨렐레를 "또 장식품이 되겠구나"라는 말과 함께 작은 방 한 켠에 세워두었고, 한동안 다시 집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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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몇 개월 후 외면하고 있던 우쿨렐레를 다시 가지고 나왔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것에 대한 미련도 한몫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엔 처음처럼 기대하진 않았다. 처음 했을 때도 손이 아팠으니까, 스트로크가 어색했으니까, 소리가 이상하게 났으니까 이번에도 비슷하게 잘 안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이번엔 달랐다. 초반에 했던 연습이 빛을 발한 건지, 아니면 숨겨져 있던 재능이 이제야 드러난 건진 몰라도 분명히 전보다 무난하게 실력이 늘어갔다.


흥미를 되찾은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손에서 우쿨렐레를 놓을 줄 모르고 계속 연습했다. 얼마 후에는 노래 몇 곡 정도는 연주할 수 있게 되었고, 처음 가졌던 로망처럼 어떤 슬픈 날에는 멜로디를 몇 개를 만들어 그것으로 자작곡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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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를 가지고 시작했던 일도 기대했던 시간 내에 잘 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게 된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처음엔 겁 없이 도전해도 여러 번 실패하면 그 고통이 두려워 다시 시작하기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 두려움이 나 자신을 그냥 '포기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번거로운 재도전을 할 필요도, 더 노력할 필요도 없고, 어쩔 수 없는 나의 성격 탓이라고 그 책임을 돌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를 포기하는 인간으로 여기는 것은 장기적인 후유증을 남긴다. 그 이름도 무서운 '패배 정신', 앞으로 무엇을 해도 어차피 잘 못할 것이라고, 끈기 있게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게 만드는 나에 대한 불신의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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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후유증을 방지하기 위해 '뽀모도로 학습법'을 인생이란 긴 시간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뽀모도로 학습법'은 일반적으로 25분 집중하고 5분 휴식하거나, 50분 집중하고 10분 휴식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집중법인데, 이것을 인생에 적용해 무언가에 집중했다가 잘 안 되었을 때, 다시는 쳐다도 보지 않는 게 아니라 잠시 쉬었다가 다시 도전해보는 식으로 변환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만약 무언가에 새로 도전할 때, 한번 해보고, 준비된 에너지나 애정이 떨어지면 언제든 쉬었다가, 다시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더 오랫동안 그리고 더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일에 딱 한 주 도전했다가 3개월 후에 다시 시작해도, 올해 2월에 시작했다가 한 달 만에 멈추고 내년 6월에 다시 시작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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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한 것에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힘에 부쳐 그 의지를 놓쳐버렸을 때, 내 자신을 '포기하는 인간'이 아니라 단지 '간헐적으로 집중하는 인간'이라고 여겨보자.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누구보다 빨리 도착하거나, 누구보다 훌륭한 결과를 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해내는 '지속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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