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둘, 소뇌위축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렸다. 거동이 점점 불편해지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건강이 나빠지는 두려움보다 하던 일을 놓아야 하는 슬픔이 더 컸다. 나는 중증 장애인 시설에서 약자를 위해 일하는 사회복지사였다. 그 일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다. 내 정체성이자 전부였다. 교대 근무로 밤을 새우며 '오늘도 무사히'를 되뇌던 순간이 떠올랐다.
내 나이 스물아홉,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코로나19가 터지면서 갑작스레 한국에 소환되었다. 일 년 반 동안 정든 이들과의 이별로 많이 울었다. 그때 슬픔이 찾아와 내게 기숙했다. 하루 삼십 분 걷는 것조차 힘겨워졌다. 이렇게 건강이 나빠진 이유가 나에게 찾아온 병 때문인지 슬픔에 압도된 것 때문인지 몰랐다. 퇴사하기 한 달 전 도미니카 공화국을 재방문하기로 결심했다. 가야 한다. 가고야 말겠다. 이십 대의 열정을 바쳐서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곳으로. 감사하게도 도미니카에 계신 선교사님과 연락이 닿아 내 바람은 쉽게 이뤄졌다.
한 달 월급을 털어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도미니카 친구들과 나눌 간증문과, 현지 교회에서 할 어린이 사역을 준비했다. 떠나기 전날 덜컥 겁이 났다. 혼자 해외를 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지구 반대편의 도미니카 공화국이라니. 막상 갔는데 사람들이 시큰둥하면 어떡하나.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부질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가야만 해.' 스스로 출사표를 던지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과거 일 년 반에 걸친 봉사활동을 매듭짓기 위한 여행이었다. 퇴직 후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도전이기도 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걱정이 무색할 만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현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구체적인 일정을 못 잡았지만 여행 내내 가야 할 곳이 마련되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생겼고 해보고 싶던 일을 미련 없이 할 수 있었다. 여행의 모든 순간 신비한 힘이 날 보호해 주는 것을 느꼈다.
어린이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을 도와 놀이를 준비했다. 예수님 캐릭터에 문구를 쓰면 한국 사탕을 붙여주는 시간이었다. 내가 생각한 문구는 '디오스 떼 벤디가(신의 축복이 있기를)'이었다. 가톨릭이 대세인 도미니카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나요?"라고 아이들에게 물으면 "착한 일을 많이 해요!"라고 답한다. 그곳에서의 사역은 구원이 착한 일을 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 있음을 알려줌으로 시작한다. 선교사님과 대화하며 '헤수스 미 살바도르(예수님만 나의 구원입니다)'로 문구를 바꿨다. 여행 내내 '헤수스 미 살바도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미니카 친구들을 만나 영혼의 대화를 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간증문을 써서 갔지만 스페인어로 번역하니 엉망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스페인어 선생님이 내 글을 다듬어주었다. 덕분에 내 속내를 온전히 전할 수 있었다. 남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처음으로 나눴다. 그들은 내 고백을 듣고 함께 기도했다.
이전에 봉사활동을 했던 '네이바'란 지역에 홀로 찾아갔다. 거기에서 나는 뎅기열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내가 사경을 헤매자 함께 지내던 도미니칸 가족들이 돌아가며 24시간 병간호를 했다. 생명의 은인과도 같던 그들과 재회했다. 홈스테이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숨 막힐 정도로 끌어안았다. "내 아들이 왔구나!" 그 말에 눈시울을 붉혔다. '맞아, 난 이렇게 큰 사랑을 받던 사람이었지!'
도미니카 여행은 내 희망이 오직 예수님께만 있음을 고백한 여정이자 신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체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예전엔 삼십 분 걷기도 버거웠는데 지금은 무려 두 시간을 걷는다. 걸으면서 기쁨에 겨워 충만함을 느낀다. 예전엔 사회적 위치가 나에게 자유를 준다고 믿었지만 인간적인 계획과 방법이 다 무너진 지금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 나의 시간은 예배와 기도로 채워지고 있다. 여전히 불안하고 마음속 갈등에 힘겨워하지만 그래도 믿기로 했다. 신이 나를 통해 당신의 뜻을 당신의 때에 이루실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