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1984>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이다. 디스토피아? 건너 건너 말은 들어봤고, 어떤 뜻인지 어렴풋이는 알지만 막상 설명하라고 하면 어려워서 이 참에 알아봤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유토피아의 반대이다. 개인성의 말살, 감시와 통제로 유지되는, 비인간화가 극대화로 실현된 전체주의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평소 허구의 세계에서 디스토피아보다는 유토피아를 찾아다니는 편이지만, 최근에 <동물 농장>을 재미있게 읽어서 이 책도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와우! <동물 농장>은 아주 마일드하고 친절하며 위트 있는 소설이었구나!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에서 <동물 농장>이 전체 관람가, 또는 12세 관람가라면 <1984>는 내 기준 청소년 관람 불가다. 읽는 내내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펴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빅브라더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기분으로 사랑을 한다. 그런 애틋한 감정을 빅브라더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이 나누는 것 자체가 일종의 반역이기 때문이다. “빅브라더가 우리를 자백하게 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마음속까지는 파고들 수 없다. 그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지만, 죽는 순간에 그들을 증오하는 나의 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은 곧 자신만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책의 막바지에 이르러, 극도의 공포와 절박함 속에서 윈스턴은 줄리아를 마음에서 완전히 배신한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낱말들 속에서 무엇인가가 거듭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 일말의 희망 한 조각조차 남겨놓지 않는 그 날카로운 황량함.
솔직히 말하면 나는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긴 했었다. ‘오브라이언이 실제로는 형제단 단원이고, 윈스턴의 진정성을 알아보기 위해 극단적인 상황에 던져놓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사상경찰인 줄 알았던 줄리아가 사실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동지라고 생각했던 오브라이언은 그를 철저하게 배신하는 사람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을 예상하고 대비했어야 했다. 물론 여기서 대비는 책을 읽는 내가 하는 마음의 준비를 뜻하는 것이다. 윈스턴이 그런 걸 대비할 수는 없겠지.
내가 지금 이런 세계에 살고 있다면 어떨까? 1초도 못 살 것 같다. 못 살 것 같다는 것이 언어를 통한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것 같다는 소리다. 일단 나처럼 성격유형검사가 대문자 I로 시작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무너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혼자 있을 때에만 자유롭고 편안할 수 있는데, 텔레스크린의 감시는 혼자 있지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그 시간을 버텨낸다고 해도 사상범으로 가장 먼저 처리될 것이다. 작은 한숨, 음울한 표정, 사색하는 얼굴 그 어느 하나 빅브라더의 눈을 피할 수가 없을 테니까. 의식적인 나는 감출 수 있어도 무의식적인 나는 어찌 할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1984>의 세계관에서 최소한 감시라도 받는 내부당원 또는 외부당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무산층 노동자에 속해 있겠지. 자기의 밥벌이와 생존에만 아등바등하여 정부를 상대로 혁명을 일으킬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는, 다분히 의도된 무식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 말이다.
2번 읽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겁고, 그냥 한 번만 읽고 넘기기에는 곱씹을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고민이다. 오늘은 일단 이런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자유에 감사하며 글을 마무리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