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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음 Jan 27. 2022

절실함을 곁에 두고


    작년 크리스마스이브를 기준하여 직장을 그만두었다. 계약기간 종료였다. 한 달이 지난 지금, 마음속으로 불안함이 스멀스멀 기어 들어온다. 직장에 다닐 때의 급여액의 90%에 해당하는 금액의 실업급여를 받을 예정이지만, 이렇게 손 놓고 앉아 있는 것이 두렵다. 그동안은 그럭저럭 마음을 편안히 가졌다. 편안한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실업급여도 나오고 어차피 쉬게 되었으니, 마음 편안히 쉬자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보름 정도 일러스트를 배웠다. 3시간씩 배웠는데, 수업은 재미있었지만,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집에서도 연습을 하고 좀 더 열심을 내야 하는데 학원에서 배우는 그 시간만 최선을 다했다. 절실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처음 일러스트를 배우려고 했을 때, 손으로 그리는 그림으로 착각했다. 아니었다. 컴퓨터로 작업하는 디자인 일러스트였다. 수강신청을 했고 돈을 내고 등록을 했으므로, 타고난 천성을 발휘하여 그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집에서 한 달 정도 꾸준히 연습해서 자격증을 취득하리라 생각했지만, 그것도 생각에서 그치고 말았다. 학원이 끝나고 수료증을 받은 뒤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일러스트를 다시 연습하지 않았다. 다운 받아온 일러스트 프로그램을 한 번도 열지 않고 가방에서조차 꺼내지 않았다. 헤어진 옛 애인처럼 마음이 가지 않았다. 가끔씩 생각이 났지만, 생각하기가 싫었다. 마음 한편에 가만히 방치했다. 


     날마다 책 읽기에 골몰했다. 일러스트 때문에 읽지 못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짬나는 모든 시간을 책 읽는 데 바쳤다. 올해 100권의 책을 읽어보리라 다짐하고, 읽은 책의 목록을 작성하고 독서감상문을 쓰는 것까지 계획했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를 더해 가는 듯했다. 다른 때 같으면 읽다가 지루해서 읽지 못하는 책들도 술술 읽혔다. 허나 글쓰기는 전혀 하지 못했다.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조금 손 봐주는 정도는 하겠는데, 내 글은, 새로운 글은 전혀 써지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는 나의 소망이 거짓이었나 하는 무력감마저 들었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느낀다. 글이 써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글을 쓰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 머리를 굴리고 손을 놀려 하얀 공간을 글씨로 메우는 일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무엇이 두려웠을까. 여기 이렇게 컴퓨터 자판에 손을 올려놓고 있으면 무슨 말이든, 무슨 글이든 말들이 저절로 튀어나와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만들어 주는 것 같은데. 이것이 문제였다. 아직은 설익은 글들이, 아니 나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고 체득하지 못한 단어들이 제멋대로 문장이 되어 버렸다. 형편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것이 진실임을 알았다. 진실을 마주할 때 사람은 가장 두려움을 느낀다고 했던가. 나는 내가 쓴 글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할 수 없었다. 내 안에서 정성 들여 다듬어 나온 말들이 아니라 손끝에서 튀어나온 말들이기 때문이었다. 사랑할 수 없었으므로 떳떳할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내 글을 보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 절실함이 없었다.


      절실함이 없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없다. 절실함이 없다는 것은 의욕이 없다는 말과 관계가 깊다. 매사를 관망하면서 관조하면서 산다. 이렇게 돼도 상관없고 저렇게 돼도 상관없다는 식. 욕망이 거세된 채로 살아간다.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마음은 유유자적인가, 자유인가. 좋은 말로 하면 넓은 아량으로 욕심 없이 산다는 말일 터이지만, 그 욕심 없음이 모든 삶을 관통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바르고 그르다는 기준은 또 어디에 기반을 둔 것인가. 


     세상의 권력과 부와 명예에서 그 무엇도 원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가. 아니면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미리 포기한 것인가. 욕심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욕망하지 않고, 넓은 마음을 가진 척 위선을 떨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나를 바로 보고, 나를 알아야 함에도 나를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그것과 같은 이치로 나는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진실과 맞닥뜨렸을 때, 그 진실에서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자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 현실을 외면하고 살 수 없는 존재, 이것이 한 사람에게 씌워진, 결코 벗어버릴 수 없는 굴레이다. 내 현실은 두 아이의 엄마이면서 한 남자의 아내라는 틀 속에 끼워진 사진이다. 네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고 다정하게 찍힌 사진 속에서 나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짓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내 피붙이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게끔 예정되었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일을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사랑했고, 다정했고, 행복하게 이끌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내게 지워진 짐이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벗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삶이었다. 나만이 아름답게 할 수 있고,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실한 삶이었다.  


      언젠가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꿈’이라면 엄마는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아?”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이 질문을 던졌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꿈이라고 해도 나는 행복하고 이 삶에 만족하는데.” 하고 나는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한순간의 부질없는 꿈인데도 만족한다고?” 딸아이가 다시 반문했다. “그래, 나는 꿈이라도 상관없어. 꿈이면 어떻고 진짜면 어떠냐. 지금 내가 여기 살고 있는데.” 하고 말했다.


     어느 날은 “엄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지옥’인데, 여기를 벗어나면 더 좋은 세상이 있다고 하면 엄마는 어쩔 거야?” 하면서 딸아이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그냥 여기서 살 거야. 나는 여기가 좋아. 지옥이라고 해도 좋고 더 좋은 다른 세상에 가고 생각도 없어. 그냥 여기서 살고 싶어.”라고 대답해 주었다. 


      이 글을 세상에 내보낸다. 좀 거창하다. 민망한 말이다. 뭐라도 된 것처럼,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그럼에도 이 모든 감정들을 무릅쓰고 덜 익은 밤송이 같은 연둣빛 글들이 읽히길 바란다. 내 글을 나 자신마저 사랑하지 못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장막에 둘러쳐져 보이지 않는 두려움의 베일을 걷어내고, 살아가는 것처럼 절실해지리라. 두려움의 자리에 절실함을 앉혀 놓고 오래오래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글을 쓰리라. 익지 않고 어리숙하고 부족한 내 글을 내가 사랑하리라. 그마저도 사랑하리라. 우리 가족의 사진 속에 끼워 넣어 함께 간직하고 끌고 가리라. 후회 없이 글을 쓰고 후회 없이 사랑하리라. 살아가리라.


                                                                                   되새겨 보는 2022년 1월 설날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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