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딩 때 학년 초, 기강 잡기가 필요한 선생님이 불미스러운 일 하나 걸리면 학급 전체를 아작내는 경우가 있었다.
주로는 교실에서 돈이나 물건이 사라졌다고 신고가 있었을 때, 선생님은 학생 전체를 책상 위로 올라가 무릎 꿇고, 두 팔 들고, 눈 감게 하였는데, "비밀은 지켜준다. 보는 사람 없게 할 테니 찔리는 사람 자수 하라"는 형식의 체벌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야." "나는 억울해"를 속으로 외치며 그 상황이 빨리 정리되기를 바라지만, 그러다 범인이 자수를 안 하면 미친개로 돌변한 선생이 몽둥이를 들고 어린아이들의 보드라운 살결에 피멍이 생길 정도의 매질로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다.
비교적 다양하게 맞아 본 나로서도 무릎 위 맨살을 타격당했을 때가 어떤 위치보다 고통스러웠는데,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수십 년에 지나도 잊히지 않고 있으니, 이것도 일종에 트라우마 아닐까 싶다.
오늘 새벽 기온이 13도, 올해 단체기합이 끝났다.
지금 쓰는 단체기합이란 말은 올여름 극강의 무더위를 생각하다 보니 너무 아프고 억울했던 그때 상황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 끌어온 표현이다. 다들 느끼는 것처럼 이번 극강의 무더위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느껴 보라는 지구의 경고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같이 사는 지구촌 공동체에서 난 잘 못 한 게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 때 동네에서 환경운동을 했고, 생활에서도 분리수거 칼같이 하는 편이고, 기후 위기에 대하여 일회용품 과잉을 주변에 설파하는 둥 나름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이번 극강의 무더위는 그 옛날 단체기합 같아서 나의 잘못 보다 남의 잘못 때문이라는 얄팍한 생각이 들었다.
작은 예 몇 개 들어 볼까?
첫째는 오수관과 우수관을 구별 못 하는 경우다. 하수관은 건물에서 쓴 모든 더러운 물을 관을 통해 종말처리장으로 보내는 시스템이다. 싱크대, 변기, 세탁실에서 사용된 오염수(오수)를 종말처리장으로 보내 정수시킨 후 하천에 버린다. 그러나 빗물(우수) 관은 건물 바깥에 있어 빗물을 빨리 하천으로 보내기 위한 장치인데, 그 우수관 뚜껑(맨홀)에 담배꽁초며 설거지물이며, 심지어 먹다 남은 찌개를 버리는 모습을 본 적 있다.
하천과 바다를 거대한 쓰레기통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다.
둘째는 물티슈가 종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일회용품이 워낙 흔해 한 번 쓰고 버리는 게 편하겠지만, 그렇다고 비닐봉지를 변기에 버리는 사람은 없을 텐데, 물티슈를 그냥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물티슈는 종이가 아니다. 종이가 아닌 석유정제 화합물에서 인공적으로 뽑아 만든 '물 비닐 수건'이다.
그러니 비닐에 준하는 물건을 변기에 버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전문가들은 분리수거 잘하는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을 크게 베인 상처에 밴드 하나 붙인 꼴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분리수거가 필요 없다고 받아들이면 참 곤란한데, 환경을, 기후 위기를 생각한다면 시민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라 법이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검색창에서 '아프리카 비닐봉지 규제'를 검색해 보라. 무지해 보이고 우리보다 가난한 아프리카 나라들도 정부가 법으로 비닐, 일회용품 사용을 금지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무지한 소비자 위에 똑똑한 정부가 일회용품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법으로 규제해서 못 쓰게 하는데, '물티슈'라는 제품명을 못 쓰게 하는 것도 못 하는 우리나라는 뭔가?
8월 15일이면 끝나야 했던 단체기합이 9월 20일에 끝났음에 안도하면 안 된다. 이번 극강의 무더위를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생활 온도가 2~3도 더 높거나 낮은 것이 잠깐이라면 적응하겠지만, 그것이 꾸준히 진행되거나 혹은 5도 이상의 편차가 생기면 그때부턴 건강 이상으로 사망자가 급증할 것이다.
한마디로 자연이 단체기합을 넘어 집단학살 하는 셈이 될 것인데, 우리 그렇게 살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