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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고도 part 2.

생과 사

by 집사 김과장






000026.JPG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비주얼



숲 속에서 잔 탓인지 새벽에 일어났는데도 머리가 맑았다.

아침에 일어나 장족들이 입는 장포를 입고 숲 속을 활보하니, 맹군이 티베트어로 이름을 지어줬다.


'쟘므트(츠)리'


길상(吉祥), 행운이란 뜻이다.

뜻하지 않은 선물에 기분이 좋아진다.

여행 내내 운수 사나운 순간이 많았는데, 뭔가 바뀔 것 같은 좋은 느낌이 들었다.




가을을 지나 초겨울로 들어설 무렵, 이른 아침 햇살은 아직 깊은 산골짜기까지 스며들지 못했다.

말들이 걸어가면서 살얼음을 밟아 깨뜨리는 소리, 향긋한 솔향기, 신선한 공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어우러진 가운데 울창하게 펼쳐진 침엽수림을 가로질렀다.

다들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느라 아무 말 없이 말을 몰았고, 고요한 아침 기운이 몸을 감쌌다.

주위는 오색 단풍으로 물들어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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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한 마리 잡을까?"



트레킹 도중 양 떼를 몰고 가는 목동을 만났을 때, 따홍이 트레킹 팀원들에게 물었다.

이틀째 야영지에서 바비큐를 하자는 얘기였다.

통바비큐와 화끈한 술 한 잔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데 이견이 없었다.

당시 기준으로 양 한 마리에 600위안(10만 원)이었다.

예상외의 지출이었지만 모두 흔쾌히 갹출했고, 맹군과 양춘이 양을 구하기 위해 샛길로 빠졌다.

우리는 따홍과 야바를 따라 30분 정도 더 산길을 지나 쉐바오딩으로 진입하는 산기슭에 있는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오후 1시밖에 안 된 시간이었는데, 이날 일정이 끝이라길래 의아해하자 따홍이 설명했다.



"앞으로는 해발고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더 들어가서 잤다간 고산병이 올지도 몰라"


000032.JPG 따홍 the magic hands




텐트 치고 야바를 도와 장작거리를 줍고 있는데, 맹군이 양을 한 마리 업고 나타났다.

양의 앞뒤 다리를 각각 묶어 어깨에 걸쳐 업고선 말을 타고 오는 맹군의 묘기에 다들 기립박수를 보냈다.

새하얀 새끼 양이었다.


오후 3시경, 캠핑 사이트 정돈이 끝나자 맹군이 말했다.


"양 잡을라니까 구경할 사람 따라오쇼!"


우리와 함께한 가이드들은 모두 회족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할랄 푸드가 아니면 입에 대지 않는다.

이날 양을 잡는 것도 바로 그들만의 방식인 이른바, '칭쩐(淸眞)'이었다.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걸 알았기에 모두 일제히 따라나섰다.





양의 네 다리를 묶어 바닥에 자빠뜨린 후 양춘이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자 맹군이 무릎으로 양의 몸통을 눌러 고정시켰다.

맹군은 양의 귀로 눈을 가린 후 턱을 당겨 목을 드러낸 다음 가차 없이 칼로 그었다.

그런데 가져온 칼이 날이 무뎠는지 상처 하나 나지 않았고, 양은 목을 가로지르는 섬뜩한 느낌에 크게 한 번 "메에!"하고 울고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맹군이 다시 잘 드는 칼을 가져와 기절한 놈의 목을 냅다 그었다.

시뻘건 선혈이 출렁 솟아났고, 기절했던 양이 깨어나 요동쳤다.

맹군은 양의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사정없이 칼을 놀렸다.

시뻘건 피 속에 기도가 잘려나가는 게 보였다.

양이 마지막으로 꿈틀 하는 순간 이상한 모양으로 눈동자가 풀리며 눈이 돌아갔다.

1분 정도 피가 빠진 후, 양은 마지막으로 경련을 일으키더니 명을 다했다.



(*) 도축 장면 사진이 나오니 원치 않으시면 스크롤을 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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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인 행위를 목격한 강렬한 충격이 내 정신세계를 헤집었다.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닌, 인위적인 죽음은 처음 본 것이었다.

팔팔하게 날뛰던 양의 생사가 순식간에 갈렸다.

생명이 덧없다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내가 살아온 경험, 기억, 감정 등 실존의 증거가 한순간에 부정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다.

먹이사슬의 한 고리에 불과한 인간의 배부른 소리일 수 있다.

하지만 양이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그 눈동자는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 오묘한 느낌은 숨을 거둔 양이 해체돼 '고기'로 변한 후에야 사라졌다.

맹군과 양춘은 대략 4시간 정도 모닥불 옆을 지키며 끈질기게 바비큐를 돌렸다.

중간중간 후추와 고춧가루, 소금, 기름을 섞어 만든 소스를 정성스레 펴 바르는 모습은 종교의식을 치르는 듯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캄캄한 밤, 모닥불에 비친 통구이 바비큐는 언젠가 영화에서 본 듯한 모양새였다.

낮에 느꼈던 착잡한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순식간에 군침이 돌았다.

맹군과 양춘이 영혼을 갈아 넣은 바비큐는 천상의 맛이었다.


고기를 씹다가 문득 맹군이 양을 도살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철학은 과연 본능을 앞설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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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을 돌리다가 따홍이 말했다.


"우린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내내 감기를 달고 살고, 온몸이 쑤셔. 산에만 나오면 활기가 돌지. 천상 산에서 살아야 할 팔자인가 봐"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적당한 식사와 운동.

이미 환갑을 훌쩍 넘은 따홍이 건강한 이유였다.

왜소한 체격의 그네들이지만 보고만 있어도 건강이 느껴졌다.


"너 이렇게 여행하고 들어가면 어떡하냐? 또 나오고 싶어서 공부가 되겠어?"


이번에는 따제가 말을 꺼냈다.

그녀의 걱정은 어느 정도 사실이 됐다.

여행 중 만난 다양한 사람들, 넋을 놓고 감상했던 비경들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내가 경험한 세계를 넘어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에 나가 좁은 울타리 안에서 쳇바퀴 돌아가는 돌아가는 삶을 산다는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러게요, 집에 가면 고민을 좀 해봐야겠어요. 뭘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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