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체코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다시 넘어갔다.
처음 유럽여행을 계획할 때 EU에서 국경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저 지도 위에 자를 대고 선을 죽 그으면 동선이 되는데, 한 국가를 한 번에 돌아야 한다고 착각했다.
할슈타트에서 체스키크룸로프로 넘어갈 때 그 사실을 인지했다.
그 결과 늦게나마 여행 일정에 빈을 다시 끼워 넣을 수 있었다.
두 달 여행이니 예산은 언제나 부족했다.
자연히 숙소를 고를 때도 가성비를 따졌다.
빈의 물가는 이제까지 다녔던 곳 중 가장 비쌌다.
예산 기준에 맞는 숙소를 찾다 보니 점점 외곽으로 빠지게 됐다.
난데없이 거주지가 서울에서 점점 멀어지는 세입자가 된 듯했다.
결국 숙소로 점찍은 곳은 빈 지하철 3호선(U3) 종점인 'Ottakring' 역 근처였다.
지하철 역은 휑하고 음산했다.
안전문도 없는 플랫폼에서 아이들이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있었다.
조명은 어두웠고 얼핏 보면 슬럼가 같기도 했다.
숙소로 잡은 에어비앤비는 평이 좋았다.
시설은 안락하고 호스트가 친절하다는 평이 줄을 이었다.
호스트는 실제로 친절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깨끗한 소개 사진과 달리 싱크대는 녹슬었고, 화장실은 방음이 안 됐다.
욕실은 말도 안 되게 좁았다.
문은 플라스틱 재질의 칸막이였다.
작심하고 걷어버리면 대책이 없는 구조였다.
주방과 세탁기가 사용 가능 옵션에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식기는 설거지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황당했던 건 세탁기였다.
장기 여행이다 보니 세탁이 일이라 가능한 세탁기가 있는 숙소를 찾아다녔다.
빈의 숙소도 그래서 고른 곳이었는데, 막상 투숙하고 나니 세탁기는 사용 불가다.
호스트의 변명이었다.
빈을 찾는 사람들은 보통 미술관에 가거나, 음악당에 간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이 여기 있다.
<미션 임파서블 5: 로그네이션>에서 톰 형이 날아다닌 바로 그곳이다.
하지만 우린 아니었다.
내 관심사는 훈데르트바서하우스 Hundertwasserhaus였다.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 등등 뭔가 많이 했다는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가 디자인한 시영아파트다.
오스트리아의 자랑이라고도 부른다.
세계 제2차 세계대전 후 풍비박산 난 서민의 삶을 재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는 시영아파트 건설을 추진했다.
그 결과 주거 기능에만 충실한 성냥갑 같은 아파트가 난립했다.
생활의 질은 포기하고 거주('수용'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듯했다) 목적에만 충실한 아파트였다.
1980년대 들어 빈 시는 이런 시영아파트 재건축 사업을 진행했는데, 훈데르트바서가 출품한 디자인이 채택됐다.
평화주의자, 환경운동가였던 훈데르트바서는 살아있는 생물 같은 아파트를 디자인했다.
심사 당시에는 반대 의견도 만만찮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빈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얼핏 보면 구엘 공원 분위기도 좀 난다.
아기자기한 아파트 상가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관광객은 즐거워도 주민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만은 않을 듯했다.
하지만 정신 나간 빈의 물가에 비해 임대료가 꽤 저렴해서 감내한다고 한다.
부산 감천마을이나, 군산 말랭이마을, 통영 동피랑, 안동 벽화마을 등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2010년 경에 안동에 사진 워크숍을 다녀온 적이 있다.
골목 어귀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놓은 채 나를 바라보던 꼬마 눈동자가 불현듯 떠올랐다.
마을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는 사진가들을 쳐다보던 아이의 눈에는 두려움과 짜증이 섞여있었다.
빈에 들어선 후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내 기준에서는 지나치게 즉흥적이고 무계획인 아내의 행동 방식 때문이었다.
아내는 이를 여행의 재미로 해석했다.
여행 초반에는 나도 동의했다.
꽉 차게 계획을 세우기보다 발길 닿는 곳으로 가는 것도 재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준이 서로 달랐다.
프라하에서는 프라하 성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가이드 북을 꺼내드는 걸 보고 기가 막혔다.
두 사람의 욕구를 절충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준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그 마저도 필요 없어 보였다.
아내는 하루 일과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그대로 잠들기 일쑤였다.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
아내가 잠든 동안 다음 숙소와 교통편, 다음 날 갈 곳 위치와 교통편, 입장료 등 정보를 알아보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빈이라는 도시는 애당초 계획에 없었다.
여행 중간에 아내가 갑자기 빈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빈에 대한 주도권을 가진 아내가 나를 끌어줬으면 좋겠는데, 아내는 빈 일정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다시 일정을 짜고, 숙소를 알아보고, 모든 계획을 세웠다.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도시를 헤매다 보니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같이 있으면 분명히 싸울 듯했다.
그렇게 아내는 호프부르크 궁으로, 나는 케른트너 거리를 지나 성 슈테판 성당으로 향했다.
케른트너 거리에서 사람을 구경하는 재미는 나쁘지 않았다.
혼자 다니다 보니 갑갑함이 좀 덜해졌다.
내 템포대로 걷고, 내키면 멈춰 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마부가 모는 마차가 관광객을 태우고 거리를 가로지르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푸른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슈테판 성당 첨탑의 위용을 느긋하게 바라봤다.
북새통 속에서도 성전은 본연의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바리케이드로 관광객과 격리된 제대 근처에 모인 신자들은 경건한 자세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인파 속에 묻힌 내 주위는 소란스러웠지만, 바리케이드 너머 제대 주위에는 성스러웠다.
성사가 거행되는 성전은 비로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 본 성당들이 화려한 치장과 장식 때문에 신이 아닌 인간의 공간으로 보였다면, 슈테판 성당은 그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거룩함이 먼저 느껴졌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여행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영성체를 못 한지 두 달이 다 돼가고 있었다.
인간의 육신은 모두 하느님의 성전이라 했거늘, 내 육신은 성전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결과 인간의 한계와 오욕이 계속 삐져나와 내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내와 다시 만나 마음을 다잡고 웃어보려 했다.
그런데 가이드 북을 보던 아내는 쇤부른 궁전 항목을 읽더니 갑자기 "여기에 가봐야겠어"라고 했다
순간 머릿속 깊은 곳에서 '뚝'하고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쇤부른 궁전은 처음 빈 일정에 대해 얘기할 때 내가 추천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본인이 관심 없다고 한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화를 냈다가는 여행이고 나발이고 그대로 비행기 표 끊어서 집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쇤부른 궁으로 향했다.
쇤부른 궁에 다다르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고개를 돌려도 시선이 따라오지 않았다.
멍한 상태로 좀비처럼 걸었다.
아내는 계속 나를 걱정했지만 원인을 알 수는 없었을 터다.
아내가 나에게 뭐라고 말을 거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결국 쇤부른 궁에서도 난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밖에서 기다리고, 아내 혼자 궁을 구경하고 나오라 했다.
숙소로 돌아와 아내와 긴 대화를 나눴다.
"내 기준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라는 아내의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어졌다.
아내는 내 요구와 기대치가 과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속도, 행동하는 속도가 아내 기준에서는 지나치게 빠르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내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겠다고 해놓고, 나도 모르게 내 기준을 아내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왜 저럴까?'가 아니라 '원래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해야 했다.
속에서 뭔가 치고 올라와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라고 되뇌는 자세가 필요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생각해 보니, 빈은 우리 여행의 분기점이었다.
이전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쌓아놨던 감정의 앙금이 드러난 곳이었다.
털어냈다고는 말 못 한다.
아직도 가끔씩 서로의 모습에서 그때를 떠올리게 되니까.
다만 그날의 뜨끔했던 기억이 아내를 이해하는 바탕이 된 건 확실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하루 24시간씩 몇 달 동안 붙어 지내다 보면 싸움을 안 할 수가 없다.
두 달 여행과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느라 집에서 공부하며 지냈던 몇 달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못 보는 시간이 있어야 애틋한 마음도 생기고, 상대를 받아들일 여유도 생기는 법이다.
좌우간 빈은 여행지로서의 기억은 거의 없다.
조금은 고통스러웠던, 조금은 희망적이었던 순간을 기억에 묻고 헝가리로 향했다.
빈은 언젠가 맨정신으로 다시 한번 찾아가보고 싶은 곳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