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한인민박
체코는 독일, 오스트리아 사이에 끼어있다.
중세, 근현대 시기 유럽 대륙 패권국 사이에 자리한 것이다.
역사를 시계로, 각 나라를 톱니바퀴로 보면, 체코는 가장 거대한 톱니바퀴 두 개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톱니바퀴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았지만 체코는 용케도 부서지지 않고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왔다.
자유의 상징, 보헤미아가 바로 체코다.
특히 프라하는 카렐 4세라는 걸출한 성군이 등장한 이후 유럽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한때는 신성로마제국 수도로 기능했으며, 유럽의 정치, 문화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세계 제2차 대전의 포화가 비껴나간 몇 안 되는 도시로 11세기 건축물도 그대로 남아있다.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은 프라하를 ‘황금의 도시’, ‘동유럽의 로마’로 만들었다.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프라하로 갈 때는 버스를 탔다.
시골 마을 간이 정류장 같은 버스 터미널 4번 플랫폼에서 시간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주위에 널브러져 있다가 버스가 들어오자 슬금슬금 플랫폼으로 모여들었다.
줄 같은 건 없지만 지정 좌석인 데다가 짐칸이 넓어 굳이 먼저 타려고 애쓰는 사람은 없었다.
시내를 벗어나니 금세 시골이다.
색이 바랜 아스팔트는 온통 땜질한 자국 투성이었다.
언뜻 땜질한 자국이 원래 아스팔트 보다 더 많아 보였다.
고속으로 달리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았더니, 눈앞으로 쏟아져 내리는 땜질 자국이 마치 테트리스 게임 화면을 보는 듯했다.
이 길 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운전사는 한 손으로 바나나를 까먹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차는 잘 달렸다.
프라하는 아내와 내가 가장 기대한 도시였다.
드라마 제목에 달아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일까?
미리 예약해 둔 한인 민박에 짐을 부려놓고 길을 나섰다.
프라하의 광화문 광장 격인 바츨라프 광장(웬세스라스 광장)에서 시작해 화약탑, 천문시계, 카를교, 프라하 성까지 일주하는 코스를 잡았다.
1주일 정도 길게 머물 예정이었기에 먼저 구 도심을 느긋하게 걸어볼 요량이었다.
바츨라프 광장 일대는 명동거리 같은 쇼핑가였다.
5월 첫 주, 평일임에도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4월 내내 혹독한 날씨에 고생했는데, 5월이 되자 따사로운 햇살이 느껴졌다.
거리 곳곳에서 비눗방울 퍼포머들이 무지개를 피워 올렸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그 아래서 잘게 부서졌다.
낭만은 잠시였다.
천문시계가 있는 구 시청사 광장에 들어선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광장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사진에서 봤던 고풍스러운 골목과 낭만적인 벽돌길은 인파에 뒤덮여 보이지도 않았다.
카를교로 넘어가는 길은 더 심각했다.
어린이날 놀이공원인 듯, 추석 귀경길 고속도로인 듯 곳곳에 정체가 일어났다.
카를 교 너머 프라하 성이 보였지만, 그보다는 성 아래로 넘실대는 인파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찌나 복잡한지 가만히 있어도 기가 빨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자신이 그토록 꿈꿔왔던 프라하는 이런 곳이 아니었다면 절규했다.
지친 아내를 다독거려 숙소로 돌아갔다.
프라하에는 한인민박이 여럿 있다.
조식 제공, 정보 습득, 지리적 요건 등을 감안할 때, 가격 면에서 호텔이나 호스텔보다 유리할 수도 있다.
특히 안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젊은 여성들이 선호했다.
프라하는 두 달간 여행 일정의 딱 중간이었다.
잠시 쉬어갈 필요가 있었다.
여행 초반 날카로운 감정 대립에 지쳤고, 독일 남부 알프스 지역 강추위에 지친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편한 환경을 찾아 한인민박에 1주일 숙박을 예약했다.
이 선택은 두 달 여행 중 가장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숙소는 깨끗했고, 식사도 훌륭했으며, 위치는 최고였다.
사람이 문제였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사장은 두 번째 대면부터 대뜸 반말을 했다.
20대 젊은이들이 주로 묵어가는 곳이라 습관적으로 말을 놓는 듯했다.
내가 동년배에 비해 동안이긴 하지만, 여권을 확인했을 텐데도 그러는 걸 보니 그냥 몸에 밴 습관인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예의를 한참 벗어난 행동이었다.
숙박 조건에 투숙일 이후 환불 불가 규정이 있었다.
다른 곳으로 옮기도 마땅찮았다.
안 그래도 간헐적인 아내와의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인데, 또다른 감정싸움을 시작했다가는 사달이 날 듯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고,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이후 그곳에서 지내야 할 1주일간 불편할까 두려워 "너 뭔데 나한테 반말이니?"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일까?
사장을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었다.
게다가 가정집을 개조한 숙소는 방음이 거의 되지 않았다.
도미토리에 묵는 20대 아가씨들은 새벽까지 수다를 떠는 게 일상이었다.
새벽 세 시에 유리를 깨는 듯한 웃음소리가 벽을 뚫고 넘어왔다.
아내 역시 내내 심기가 불편한 눈치였다.
쉬려고 들어갔던 곳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프라하의 첫인상은 최악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