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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Dec 02. 2024

오래 보아야 예쁘다

프라하의 봄






달력에 새겨진 숫자는 봄을 가리키지만, 실제 느끼는 계절은 요원하다.

추적거리는 빗줄기와 싸늘한 기온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는다. 

숙소는 4층 건물 맨 위층이다.

하늘로 난 창을 빗줄기가 두드려대는 소리가 제법 운치 있다.

늘어져 쉬려던 계획대로 커피 한 잔 내려 일기를 썼다.

한껏 게으름을 피우다가 점심때가 지나 길을 나섰다. 


구글 지도를 검색하다가 '스트라호프 수도원 Strahovský klášter'을 발견했다. 

1143년에 세워졌으니 9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이다. 

수도원 맥주가 그렇게 맛있다길래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양조장이 개방하지 않는 날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 


그러나 꼭 맥주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곳을 방문할 이유는 충분하다. 

수도원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중세 어딘가에 툭 떨어진 기분을 느끼게 된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은 웅장하고, 화려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로 영화, 드라마, 광고 촬영지로 자주 쓰인다. 


중세 시대 수도원은 대학의 기능을 수행했다. 

세계 각지의 지식과 정보가 수도원으로 모여들었다.

도서관에는 책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대 생물 화석부터  중국 당나라 때의 도자기(당삼채), 일본 불상도 있었다. 

지리적, 역사·문화적 요인 때문에 중세 유럽은 닫힌 사회였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무지의 소산이었다. 

역사는 은근하게, 그리고 억척스럽게 얽히고설키며 흘러왔다. 








프라하를 다녀온 사람 대부분이 입을 모아 말한다.

"카를 교에서 보는 프라하 성의 야경은 환상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가 보다. 

나는 아니었다. 


프라하에서 머문 1주일 동안 카를교를 건너 다니는 게 일이었다.

블타바 강변에서 바라본 프라하의 야경은 을씨년스러웠다.

밤마다 긴급 출동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가 질주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여행자는 불안했다. 

혼란스러운 카를교에 기대어 진하게 키스하는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취객과 그들을 피해 바삐 걸음을 옮기는 여행객들 모습이 더 많이 보였다. 

그리고 추웠다.

이 동네는 봄이라는 게 없는 곳 같았다. 


어느 날인가 프라하 남쪽 비셰라드에 가기 위해 트램을 기다렸다.

비좁은 건물 사이를 위태롭게 비집고 나오는 트램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대중교통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도시를 개조하는 게 아니라, 도시의 모양에 맞게 인프라를 축소했다. 

유럽 대부분 국가가 오래된 도시를 그대로 보존한다.

아름다운 유산을 소중히 생각하고 불편한 일상을 감내한다.

이런 게 진정한 보수적 사고 아닐까?

멀쩡한 강바닥을 파헤치고, 기괴한 인공미에 집착하는 사고방식 말고. 


그래서였을까? 프라하를 떠날 때가 되니 도시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길거리를 활보하는 관광객들도 그저 프라하 풍경의 일부로 보였다.

불친절할 정도로 무뚝뚝한 체코 사람들도 그저 원래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탓이었다. 

그간 매일 이동 경로와 숙박 등 다음 일정을 위한 계획에 쫓기느라 현재를 즐기지 못했다. 

이 속박에서 벗어나고 나니 프라하의 일상이 보였다. 

현관마다 달려있는 조각 장식은 아름다웠다. 

늦은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돌 길이 정다웠다.

미친 듯이 몰려드는 손님들을 대하는 마트 캐셔의 무뚝뚝함은 오히려 '그 상황에서 용케 평정심을 유지한다' 싶을 정도로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다시 찾은 프라하 성 옆,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우보스 거리는 푸근했다. 

거리에 서서 잠시만 기다리면 인적이 잦아들며 한산해졌다.

길게 뻗은 경사로 끝에 사람들이 일렁이는 말라 스트라나가 보였다. 

거리 곳곳에 분위기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숨어 있었고, 성과 만나는 거리 끝 전망대에 늘어선 사람들은 아스라이 보이는 프라하 시내 풍경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첫인상은 최악이었지만 다행히 떠날 때는 좋은 기억을 품고 떠난다. 

다음에 찾을 때는 더 아름답기를.

오스트리아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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