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을 먹고 사는 구조, 게임은 어떻게 위축되는가
최근 몇 년 사이 게임 산업은 공공의 적처럼 취급되는 상황을 반복해서 마주하고 있다. 지난번엔 NC였고, 그 다음엔 스마일게이트, 또 그 다음엔 누가 될지 모른다. 사실 이는 중요하지 않다. 소비자의 분노는 이미 특정 회사를 넘어 하나의 정서 구조처럼 확산되고 있고, 그 안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유튜버, 스트리머, 커뮤니티, 그리고 칼럼니스트. 그들은 누군가를 꾸짖고, 실책을 드러내며, 정당한 분노를 전시한다. 그리고 이 '말하기'는 곧 구독자와 후원으로 이어진다.
비판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꽤나 정확했고, 오래 쌓인 피로와 실망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한 건, 단순히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비판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구조' 그 자체다.
"내가 욕했더니 XX가 사과했다"는 승리 서사, "정의를 실현했다"는 구현 서사. 이 구조는 분노를 일으킨 대상보다, 분노를 전달한 자에게 더 많은 관심과 생계를 안겨준다. '비판의 정당성 → 감정의 공유 → 생계의 구조'.
비판이 자산화되는 방식이다.
이런 구조 안에서 기업은 더욱 위축된다.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의지보다는 '지금은 조용히 있고, 고개 숙이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만이 정답'이라는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소통일까? 많은 게임사들이 개발자 인터뷰, 운영자 방송, 커뮤니티 소통 창구 등을 열고 유저의 목소리를 듣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실상 유저가 원하는 건 '듣는 것'이 아니라 '혼나는 것'이다. 기업은 진심을 전하려 하기보다, 꾸중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연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에 처해 있다.
게임사의 '소통'이란 그래서 모순적이다.
처음에는 대화의 통로로 열렸지만, 지금은 비생산적인 감정 소비의 창구가 되어버렸다. 유저는 '즉각 들어줄 것'을 요구하고, 기업은 '무조건 들어주는 척'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호작용은 실제로는 콘텐츠의 완성도, 재미, 장기적 방향성과는 전혀 다른 궤도 위에 존재한다.
유저가 모든 판단을 대신해줄 순 없다. 기업이 모든 요구를 수용하는 것도 옳지 않다. 소비자는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만, 거절당할 수 있음 역시 함께 인정해야 한다.
얼마 전 "중국은 기발한 게임 잘 만드는데 한국은 왜 이러냐"는 댓글을 보았다. 흔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단순한 비교 속에 중요한 질문이 숨어 있다.
'도대체 왜 한국 게임사는 창의가 아니라 생존을 먼저 고민하게 되었는가?'
창의는 위험을 수반한다. 새로운 시도는 실패 확률이 높고, 실패의 충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어떤 때는 비난마저 따른다. 한국 게임 산업은 유난히 여론에 민감하다. 정치권의 단속, 부모 세대의 오랜 낙인(먼 과거엔 그게 '만화'였다), 그리고 게임이 '몰두'가 아닌 ‘중독’으로 분류되어 온 문화. 그 속에서 게임사는 늘 살아남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음악, 영화 등의 콘텐츠와 달리 게임 콘텐츠 몰입은 비생산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게임에 돈 쓰는 남편'을 소개하는 예능 프로에서, 가수와 배우 패널들이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세태다.)
잘 만든 게임은 결국, '살아남은 게임사'에서만 태어난다. 이 단순한 구조를 많은 사람이 간과한다. 우리는 게임사의 창의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살기 위해 복종하는' 환경을 만든다. 비판은 필요하지만, 반복적이고 감정적인 비판 구조는 창의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미 한국의 도전적 게임들은 중국의 거대 투자 자본 위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산업 그 자체와 투자 흐름이 쪼그라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지금 필요한 건 새로운 말하기라고 확신한다. '비판을 넘어서 구조를 짚고, 감정의 표출을 넘어서 산업의 생존을 이해하려는 시선.' 지금은 정화가 아니라, 설계의 시간이다.
나는 묻고 싶다. 우리가 다음으로 말해야 할 건, 또 다른 대상에 대한 분노인가? 아니면 이 구조의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인가?
이 역시 비판하는 당신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함께 외칠 수 있는 하나의 구호를 제안하고 싶은 것이다.
'비판을 넘어, 바꾸자.'
창의는 두들겨 맞은 뒤에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