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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Apr 16. 2024

ep. 1

흘러가는 시간



‘지겹지도 않냐? 빼라 좀’





군복무 시절 점호 시간에 사수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이유인즉슨 오른쪽 팔에 찬 노란 팔찌 때문인데 아무 말하지 않고 군복 소매로 팔찌를 가리고 점호를 마쳤다.




입대 한 달 전, 서울에 올라와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에서야 헤어져 지하철을 탔는데 피곤한 나머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 채 잠에 들어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광화문 역이었다. 찬 공기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비틀비틀 내려서는 광장으로 올라갔다.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이 제일 먼저 눈에 보였고 광장의 모서리, 구석진 곳에 컨테이너들이 있길래 가봤더니 영정 사진들과 함께 노란 리본이 걸려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아무 말 없이 사진 속 얼굴들을 한 명씩 찬찬히 바라보다 영정 밑에 생년이 보였다. 대부분이 나랑 같은 나이였다.


방명록을 쓰고 나와 옆 컨테이너를 보니 유가족 분들이 노란 리본을 만들고 계셨다. 지금도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작정 들어가 저도 같이 리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낯선 손님에 당황할 법도 하신데 라디에이터를 가져다주시며 이곳에 앉아서 리본을 만들면 된다고 하시고는 기특하다며 내게 커피를 주신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차마 숙취로 인해서 잘 못 내렸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우리 아이도 이때쯤 군대를 갔겠네’



학생이냐는 질문에 입대를 앞두고 있다는 답을 하자 돌아온 말이었다. 순간 흠칫하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 명씩 봤던 얼굴들, 생년월일 그리고 유가족.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누군가 그랬다. 부인을 읽은 사람을 일컫는 단어도 있고, 남편을 잃은 사람을 일컫는 단어도 있고, 양친을 잃은 사람을 일컫는 단어도 있지만, 자신을 잃은 사람의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마 그 단어가 없는 이유는 그 슬픔과 좌절감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에 가기 전 내 손을 붙잡고 잊지 말아 달라며 자신의 노란색 리본 팔찌를 내 손목에 걸어주셨다. 그래서일까. 지난 7년 동안 노란 팔찌를 빼본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아 내 손목이 누군가에게 보이게 된다면 일부의 사람은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을 회상시킬 수 있을까 해서. 노란색 빛이 바래지지 않으려 팔찌를 씻고 착용하기를 반복했다.




흘러가는 시간을 세월이라 말한다.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흐릿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내가 이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불과 일주일 전 기억도 흐릿해지는 요즘이지만

그날의 기억은 평생 안고 가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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