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온통 잿빛이다.
비 올 줄 뻔히 알면서도 집이 갑갑하여 서브노트 한 권 손에 쥐고 불암산 둘레길을 찾았다. 무장애 데크로 이어지는 이 길은 책을 보면서 걸어도 부담이 없어 자주 찾는 길이다. 집 근처에 이런 길이 있다는 것은 더없이 행복한 일이다.
먹구름 밀려오더니 빗줄기가 세차게 몰아친다. 천둥소리에 화들짝 놀란 새 한 마리가 황급히 꽁무니를 빼고 있다. 나도 비를 피해 숲 속 정자로 뛰어들었다.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은 비를 마냥 바라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나뭇잎을 적시고 대지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정겹다. 숲과 비의 아름다운 협주곡이다. 축 늘어져있던 나뭇잎들이 음악에 맞춰 한들한들 춤을 춘다. 비가 잦아들자, 옹기종기 모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대지의 숨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빗방울이 뺨을 스친다. 일어서야 하는데 좀처럼 떠나고 싶지 않다. 그냥 이 순간, 이 느낌으로 잠시 나를 내버려 두는 것, 때론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눈을 들어 빗속에 갇혀있는 길을 본다. 하얀 길, 텅 빈 길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내가 가고 있는 길 저편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물어도 대답이 없다.
잠시 내가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평온한 때도 많았지만, 때론 안개 덮이고, 비바람 몰아치고, 눈보라 거친 날도 많았다.
모진 폭풍 지나고 나면 훤히 보일 줄 알았던 길이 다시 텅 빈 채 내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요즈음, 부쩍 내 몸에 돌덩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털어버리려 애써도 쉽지 않다.
가슴에, 어깨에, 발목에 돌덩이 하나씩 달고, 오늘도 나는 텅 빈 길을 간다. 세월의 때를 덕지덕지 묻히고 애써 걸어왔으니 이젠 가벼워질 만도 한데, 발길은 여전히 무겁다. 어쩌면 털어 버리려고 애쓰는 일 자체가 무모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비가 그쳤다.
걷고 또 걸으며 떨쳐버리려 해도 떠나는 것은 없고, 또다시 쌓이는 상념들만 발길에 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