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10개월. 처음 이 땅을 밟던 날의 두려움과 설렘으로 더듬거리던 시간이 지나고, 우리 가족은 비로소 일상에 작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 평온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언어도, 학교도 낯설었던 아이들은 한동안 이 땅에 적응하는데 쉽지 않은 날을 보내야 했다. 말이 조금씩 트이고 친구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면서, 아이들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돌아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부모로서 가장 큰 위안이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출발선에 섰다. 미국과 캐나다 동부를 향한 한 달간의 여정.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아이들이 세상의 넓이를 몸으로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를 해왔다. 200여 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 세계의 중심이 된 나라의 힘이 무엇인지, 교과서가 아닌 도시와 강과 길 위에서 스스로 체감하길 원했다. 여행은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집
그동안 우리는 콜로라도와 유타, 와이오밍과 애리조나, 네바다, 뉴멕시코, 텍사스 등을 달리며 이미 여러 번 길 위에 섰다. 장거리 운전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한 달이라는 여행은 준비부터가 작은 이사다. 차량을 점검하고 브레이크와 타이어를 갈았다. 장거리 여행에서 차량 상태는 곧 안전이다. 아이들의 책과 옷, 텐트와 침낭, 간단한 취사도구도 챙겼다. 반찬거리와 통조림, 음료수, 과자 등도 실었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김치. 아이스박스를 가득 채운 김치 통이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9인승 차의 중간 좌석을 빼고 매트리스를 깔아 작은 방을 만들자, 차 안은 한 살림을 차린 ‘움직이는 집’이 되었다. 장거리 이동 중에는 Rest Area를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미국의 고속도로 휴게 공간은 넓고 깨끗해 간단한 식사를 해결하기에 무리가 없다. 이것이 그동안 여행의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이다. 다소 불편함도 있겠지만,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가족의 시간이 될 것이다.
6월 중순. 방학은 이미 시작됐지만, 아이들에게 교회 여름성경학교는 여행만큼이나 소중한 경험일 수 있기에, 우리는 성경학교가 끝나는 날 여행을 출발하기로 했다. 3박 4일 여름성경학교가 끝난 날. 목사님의 기도를 안고 덴버를 출발했다. I-76 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이들이 차례로 짧은 기도를 올린다. 작은 손을 모은 채 “안전한 여행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속삭이는 모습에, 핸들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간다.
콜로라도에서 네브래스카로
덴버를 떠나 콜로라도주를 벗어나는 데만 세 시간이 더 걸렸다. 콜로라도의 높은 산세가 멀어지고, 네브래스카의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밭과 간간이 보이는 소 떼, 말 떼. 하늘은 넓고, 도로는 곧게 달린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스케일은 늘 이런 풍경 속에서 절로 실감이 난다. 간간이 작은 호수가 눈에 띈다. 대부분은 농업용 인공저수지다. 강수량이 많지 않은 지역에서 대규모 농업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광활한 평야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미국 농업 경쟁력의 기반임을 실감하게 한다.
한참을 달리다 차량이 멈춰 선다. 전복된 트럭과 경찰차 여러 대가 보인다. 추돌이 아닌 단독 사고인 것을 보면, 졸음운전으로 여겨진다. 끝없이 직선으로 뻗은 도로에서는 졸음운전이 가장 큰 위험이다. 길 위의 사고는 여행의 설렘을 단번에 가라앉힌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 ‘안전’이다. 여행의 즐거움보다 먼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족이 옆자리에 앉아 있다. 나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핸들을 부여잡는다.
낯선 땅, 작은 식탁
해 질 무렵, York에 닿았다. 중서부의 작은 도시다. 장거리 운전 첫날이라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의 소도시 모텔은 비교적 가격이 합리적이다. 특히, 간단한 조식(Continental Breakfast)을 제공하는 곳이 많아 여행객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하다.
객지의 첫날밤,
여장을 풀고 지친 몸을 침대에 던진다. 숙소 방 안, 전기밥솥에서 구수한 밥 냄새가 퍼진다. 예전 여행에서는 몰래 가스버너를 켜야 했지만, 이제는 전기밥솥까지 챙기는 여유가 생겼다. 큰 양푼에 밥을 비벼 나누어 먹으며 아이들이 웃고 떠들어댄다. 낯선 도시의 작은 방이 그 순간만큼은 가장 편안한 가족 식탁이 된다. 행복이 흐르는 식탁이다.
아이오와를 지나 미시시피로
다음 날 아침, 네브래스카가 콜로라도보다 한 시간 빠르다는 사실을 깜빡해 허둥댔다. 또, 중간에 Exit을 잘못 빠져나와 도심과 연결되는 엉뚱한 도로를 타게 됐다. 이런 작은 변수도 장거리 여행의 일부다. 아들과 딸은 “아빠의 주특기가 나왔다”며 한바탕 웃어댄다. 아빠의 실수를 즐기고 있는 아이들이 귀엽다.
한참을 돌아 다시 I-80번 도로로 들어섰다. 내가 생각해도, 난 길눈이 어두운 편이다. 그나마 미국 전역을 지도 한 장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도로 시스템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미국의 Interstate 도로 체계는 단순하다. 남북은 홀수, 동서는 짝수 번호. 번호만 알아도 대략적인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광활한 국토를 효율적으로 연결한 이 도로망은 미국 경제의 동맥과도 같다.
I-80을 따라 두 시간을 더 달려 오마하(Omaha)에 닿았다. 네브래스카와 아이오와의 경계 도시다. 큰 도시는 아니지만, 물류의 요지다. 아이오와 역시 광대한 농경지대다. 옥수수와 대두가 끝없이 이어진다. 중서부를 달리다 보면, 미국이 왜 ‘세계의 곡창지대’라 불리는지 이해하게 된다. 일리노이 경계에 가까워지자 미국 중부를 남북으로 가르는 거대한 강, 미시시피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릴 적부터 이름으로만 듣던 강이다. 기대와 달리 우리가 건넌 지점의 강폭은 서울의 한강보다 좁아 보였지만, 그 이름이 가진 상징성은 크다. 대륙의 시간을 품고 흐르는 강을 건너며, 언젠가 이 순간이 아이들 기억 속에 작은 좌표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건너는 강이 미시시피야!”
1,065마일
비를 맞으며 여섯 시간을 더 달렸다. 덴버를 떠난 지 이틀, 1,065마일을 달려 드디어 우리의 첫 목적지 시카고에 도착했다. 시카고는 미국 제3의 도시이자, 오대호 연안의 거점 도시다. 순환도로를 돌며 숙소를 찾는 데 애를 먹었지만, 공항 인근의 모텔에 자리를 잡았다. 장거리 운전 끝에 느끼는 피로는 깊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묘한 충만감이 자리한다.
애엄마와 딸은 벌써 잠이 들었다. 아들과 여행 정보 책자와 지도를 보면서 내일 시내 투어 계획을 세우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이제 동부라는 또 다른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여행의 진짜 의미는 몇몇 도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곳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