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도시, 시카고(Chicago)

by 윤기환


뉴욕, LA에 이어 미국 제3의 도시 Chicago. ‘알 카포네’의 전설이 살아있는 도시, 재즈와 블루스의 고향이기도 한 시카고는 중부 내륙 쪽에 자리함으로써 대도시이면서도 비교적 전형적인 미국의 모습이 살아있는 도시다. 바다 없는 내륙에 있으면서도 바다 같은 미시간호를 품고 있는 지리적 이점과, 도시를 관통하는 시카고강이 일리노이강과 연결되고, 다시 미시시피강 본류와 연결되면서 교통의 요지가 되어 이 도시를 물길 위에 세웠다. 대륙의 곡물과 철강, 사람과 문화가 이곳을 거쳐 흘러갔고, 그 길목에서 시카고는 미국의 ‘근육’이 되었다.


Lake Shore Drive


아침을 간단히 먹고 I-55에서 Lake Shore Drive로 들어섰다. 월요일 아침, 러시아워가 지난 시간이지만 길 위엔 여전히 차들이 빽빽하다. 오른편으로는 유리와 철골로 솟은 빌딩 숲이, 왼편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미시간호가 펼쳐진다. 잠시 속도를 늦추고 경치를 눈에 담았더니 뒤차가 성급하게 경적을 울린다. 이곳은 감탄보다 속도가 우선인 하이웨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서둘러 차선을 비켜 주며 멋쩍은 웃음을 던져주었다.


대도시이면서도 정돈된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시카고 중심가의 첫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Lake Shore Drive가 끝나고 Sheridan Drive로 연결되면서 주택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미국 중산층들이 어떤 집을 짓고 사는 가를 보여 주기라도 하는 듯, 저마다 다른 모양의 지붕과 창, 벽돌 빛을 지닌 집들이 뽐내듯 이어진다.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부러움에 가득 찬 아내와 아이들이 “이런 집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네이비 피어(Navy Pier)


우리는 네이비 피어(Navy Pier)에서 유람선을 탔다. 배는 95분간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코스다. 미시간호 위에서 바라본 도시는 또 다른 표정을 보여 준다. 육지에서 올려다볼 때는 높이로 압도하던 빌딩들이, 물 위에서 보니 수평선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다정하게 달린다. 아이들은 이렇게 큰 배를 타 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은 모양이다.

네이비 피어

해적선 닮은 배의 돛을 올리는데 남자 몇 명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한다. 아들과 내가 선뜻 나서니 몇 사람이 따라나선다. 무거운 돛이 장정들 대여섯 명이 끌어올리는데도 생각보다 천천히 올라간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지만 펼쳐진 돛을 보니 행복하다. 아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힘을 모으는 이 단순한 장면이 오래 남을 것 같다.


고등학교 지리 시간에 단지 시험을 위해 외웠던 5 대호 (미시간· 슈피리어·이리·온타리오·휴런호).

교과서 속 활자에 불과했던 '미시간호'가 눈앞의 물결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미시간호는 호수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광활하다. 남북으로 500km, 동서로 150km나 된다니, 바다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크기다. 잔잔한 물결과 함께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다시 돌아온 항구에는 갈매기들이 지천으로 날고 있다.

바다와 같은 미시간호와 해적선 크루즈

도심으로 돌아와 박물관을 찾다가 작은 해프닝도 겪었다. 우리가 기대했던 곳은 자연사 박물관(The Museum of Natural History)이었지만, 발걸음이 닿은 곳은 규모가 작은 자연박물관 (Nature Museum)이었다. 1,600만 점이나 되는 수장품과 고대 이집트의 미라가 전시되어 있다는 자연사 박물관에 대한 기대를 안고 들어갔다가, 그야말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자연 공부만 하고 나왔다. 아이들이 아빠의 실수를 또다시 놀린다. 짧은 일정 속에서 아이들이 기억할 만한 곳을 일사불란하게 보여준다는 것이 쉽지 않다. 아쉬움을 남겼지만, 여행의 결을 조금 더 인간적으로 만들었다.


시카고 지하철, Blue Line


시내 루프 지역을 돌다가, 아들이 시카고 지하철을 한번 타보자고 한다. 좋은 제안이라 생각하고 유니온역에 들어섰다. 1인당 1.5불. 지하철 Blue Line을 탔다. 서울의 지하철보다 조금 좁고, 오래된 시설이라서 그런지 많이 낡아 있다. 그러나 총 7개 노선이 시내 Loop 지역을 통과하면서 시민의 훌륭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서울에서는 늘 타고 다니던 지하철이었지만, 낯선 도시에서 모처럼 사람이 가득 찬 지하철을 타니 감회가 새롭다. 흑인과 백인, 유색인종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공간 여기저기서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지하철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다. 진짜 미국의 중심부에 와 있다는 것을 새삼 느껴본다. 대여섯 정거장 지하철 체험을 마치고 다시 유니온역으로 돌아왔다.


시카고의 마천루, 시어스 타워(Sears Tower)


해질 무렵, 시카고의 마천루, 시어스 타워(Sears Tower, 현 Willis Tower)로 향했다. 1973년 완공 당시 442m(110층) 세계 최고층이었고, 지금도 시카고의 랜드마크인 시어스 타워는 건축사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건축기술의 발전과 도시미관에 커다란 기여를 하면서, 지금도 연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세계적 명소로 자리 잡았다. 시어스 타워 전망대에 오르니, 도시 전체가 하나의 설계도처럼 펼쳐진다. 질서와 개성이 공존하는 스카이라인을 보며, 시카고의 건물들은 ‘건축학도들의 교과서’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오늘의 시카고가 이처럼 아름다운 건물로 세계의 자랑거리가 된 것은 다름 아닌 1871년 시카고 화재 이후의 일이다. 전망대에 기록되어 있는 시카고 화재기록을 보면, 그 당시의 참혹한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1871년의 대화재는 거센 바람을 타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서 시카고는 다시 태어났다. 철골 구조와 고층 건축을 실험한 ‘시카고학파’가 이곳에서 태동했고, 마천루의 시대가 열렸다.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들이 이곳에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고 지금의 시어스타워를 비롯한 존 핸콕센터, 제임스 톰슨 센터, 트리뷴 빌딩 등 아름다운 빌딩의 숲을 이루게 되었다.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하나님이 자연이 아닌 건물을 만들었다면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재난을 계기로 도시의 얼굴을 새로 그려낸 역사. 그래서 시카고의 빌딩들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상처를 딛고 선 의지의 기념비처럼 보였다.

시어스 타워에서 바라본 시카고 교통망과 시내 전경

안녕! 바람의 도시, 시카고


전망대에서 내려올 때쯤, 빌딩들이 하나둘 불을 밝힌다. 화려한 야경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도시를 빠져나왔다. 서쪽 하늘이 구름 사이로 붉게 타오른다. I-94를 타고 미시간호를 따라 달리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시카고는 바람의 도시(Windy City)라 불린다. 미시간호를 끼고 있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바람이 강하게 느껴지는 도시. 그 거센 바람은 한때 불씨를 실어 나르며 도시를 태웠지만, 또 다른 바람은 사람과 사상을 실어 나르며 도시를 키웠다. 그 바람 속에서 우리는 하루를 스치듯 지나갔다. 도시는 거대하고 볼거리와 먹거리도 많겠지만, 우리의 시간은 짧았다. 비록 하루의 여정 속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역사와 일상이 겹쳐진 한 장의 풍경으로 우리 가족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바람의 도시를 뒤로 하고, 인디애나를 지나 미시간으로 넘어가는 밤길. 아내와 딸은 잠들고 아들만 조수석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낮에 본 도시와 호수, 돛을 올리던 순간을 이야기했다. 어둠 속을 달리는 차 안은 움직이는 작은 방이다. 평화롭고 아늑하다.

밤 열두 시 가까이 되어 도로변 ‘컴포트 인’에 여장을 풀었다. 오늘도 컵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대신하고, 침대에 몸을 누이며 달려온 하루를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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