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호(Lake Erie)를 끼고 달리는 길

by 윤기환

디트로이트(Detroit) - 자동차의 심장, 영광 이후의 시간

아침 기상이 늦었다. 전날의 긴 운전이 몸에 남아 있었던 탓이다. 9시가 넘어 I-94를 타고 디트로이트를 향한다. 길 위에서 만난 Ann Arbor는 숲에 잠긴 듯 고요하다. 명문 미시간 대학 (University of Michigan)이 자리한 도시. 작은 도시이지만 좋은 환경과 우수한 교육시설로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잘 다듬어진 녹지와 단정한 건물들이 ‘배움’이라는 이름의 시간을 품고 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아늑하고 평화롭다.

오후 1시, 디트로이트에 도착했다. 휴런호와 이리호를 잇는 디트로이트강을 끼고 선 도시. 1701년, 앙투안 드 라 모트 카디악(Antoine de la Mothe Cadillac)이 무역 거점을 세우며 시작된 역사는, 20세기 초 Henry Ford가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거대한 산업의 심장으로 뛰기 시작했다. Ford Motor Company, General Motors, Chrysler. 이른바 ‘빅 3’가 뿌리내린 도시, ‘Motor City’라 불리던 곳이다. 디트로이트는 곧 ‘아메리칸드림’의 다른 이름이었다.

디트로이트 시기와 휘장


그러나 구도심에 들어서자, 나는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을 마주했다. 늘어선 건물의 벽은 갈라지고, 창문은 온통 깨져 있다. 한때 수천 명의 노동자가 오가며 쇳소리를 울리던 공장들은 텅 비어 있다. 녹슨 철문은 굳게 닫혀 있고, 잡초는 콘크리트를 뚫고 자라고 있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주택가의 집들은 유리창이 깨진 채 바람만 드나들고 있다. 도시 전체가 깊은숨을 멈춘 듯하다. 한낮임에도 거리에는 적막이 내려앉아 있다. 화려했던 산업 도시의 영화는 어디로 갔을까? 번성의 속도가 빨랐던 만큼, 쇠락도 급격했다는 사실을 이곳은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다. 번영이 영원하지 않다는 진실이, 폐허의 벽면마다 적혀 있는 듯하다. 전성기의 환호를 기억하는 도시는, 그 기억이 클수록 상처도 깊다. 디트로이트는 단순히 경제가 무너진 도시가 아니라, 한 시대의 꿈이 식어버린 자리처럼 느껴진다. 구도심을 돌다가 잠시 속도를 늦추며 생각한다.


“도시도, 사람도 때가 되면 늙는구나!

폐허가 된 구 시가지 주택가와 공장

주유소에서 신도시로 가는 길을 묻자, 젊은 흑인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방향을 알려준다. 그 환한 미소를 보는 순간, 폐허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숨 막히는 도시에서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선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위로를 받는다. 도시는 무너질지라도, 사람은 남는다. 사람이 있는 한, 다시 시작할 가능성도 남는다.

하이웨이를 타고 신시가지로 들어섰다. 고층 빌딩 사이로 공사가 한창이다. 크레인이 움직이고, 도심 곳곳마다 공사를 하느라 길이 좁아지고, 일부 구간이 통제되기도 한다. 쇠락의 흔적 위에 새 층을 올리는 중일 것이다. 한때 “미국의 자존심”이었던 시절의 영화를 되찾고자 오늘도 이 도시는 열심히 뛰고 있다. 나는 이 모든 모습들이 재도약하려는 디트로이트시의 강한 몸짓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윈저(Windsor, Canada) — 강 건너 만난 또 다른 풍경


디트로이트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캐나다의 윈저. 며칠 후면 캐나다로 건너가겠지만, 지척에 있는 캐나다 도시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발길을 끈다. 해저의 Detroit–Windsor Tunnel을 지나자 캐나다 국기가 펄럭인다. 강 하나 건넜을 뿐인데 공기가 달라진 듯하다.


윈저는 소박하고 단정했다. Lake St. Clair를 끼고 달리니 물빛이 잔잔하다. 강 건너 디트로이트의 스카이라인이 오히려 더 또렷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풍경은 보는 자리마다 다르게 빛난다. 호수를 끼고 있는 그림 같은 집들을 구경하며 차로 한 바퀴 돌았다.


디토로이트강을 사이에 둔 디트로이트 신시가지(좌측)와 윈저시 풍경

오후 세 시. 아이들이 배고픔을 호소한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침에 준비해 온 밥에 김치와 참치를 넣어 비빔밥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이것을 ‘엄마표 양푼 비빔밥’이라 부른다. 낯선 땅에 앉아 먹는 익숙한 맛. 행복을 부르는 맛이다. 호숫가를 잠시 걷는 동안 마음도 물결처럼 잔잔해진다.

클리블랜드(Cleveland) — 저녁 빛에 물든 이리호

Ambassador Bridge를 건너 두어 시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톨레도를 지나 클리블랜드에 닿았다. 오대호의 하나인 Lake Erie를 품고, 미시시피강 지류인 오하이오강을 따라 대서양과 연결되는 항구도시. 제조업과 철강 산업으로 크게 흥하면서 한때는 돈이 넘치는 도시였다.

도시의 첫인상은 의외로 단정했다. 도시는 다소 한산했지만, 고풍스럽기도 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저녁이 내려앉은 다운타운, 불 밝힌 야구 경기장에서 함성이 흘러나온다. 수변에 위치해서 물과 도시를 함께 조망하게 하는 Cleveland Browns Football Stadium도 이채롭다.

클리블랜드 시가지 풍경

차를 돌려 도심을 빠져나오니, Edgewater Beach 표지판이 보인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모래사장이 길게 늘어져 있고, 바위들이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를 이겨 내고 있다. 미시간호가 그랬듯이, 이리호 또한 바다와도 같은 드넓은 수평선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문득, 바다인가 싶어 손끝에 물을 찍어 맛을 보니 싱겁다. 분명 민물이다. 아들은 공을 들고 물가를 뛰고, 딸아이는 모래성을 쌓는다. 서쪽 하늘 붉게 물든 석양을 바라보며 아내가 살며시 팔짱을 끼며 말한다.


“제2의 신혼여행 같아요!”

저녁빛에 물든 Edgewater Beach

붉은 수평선, 물빛 위를 건너는 바람, 아이들의 웃음소리. 여행은 이렇게 또 한 장의 아름다운 장면을 선물한다. 스쳐 지나가면 사라질 풍경이지만, 마음에는 오래 남을 순간이다.


밤 11시, 펜실베이니아 경계의 작은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오늘도 이리호를 따라 달린 길 위에 하루를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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