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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May 23. 2024

또 다른 고향

  국민학교 5학년을 마치고 고향을 떴다. 호남평야의 들녘은 풍요의 상징이었지만, 보릿고개를 넘기 힘든 벌판이기도 했다. 중학교 무시험이 발표되자, 논 두 마지기가 전부였던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아들 셋 공부라도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부모님은 서울행을 택했다. ‘70년 초, 엄동설한을 뚫는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10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이 나의 또 다른 고향, 구로동이다. 그곳에서 국민학교,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기까지, 열 번 남짓 이사를 하며 스무 해 가까이 살았다.


  결혼과 함께 구로동을 떠난 지도 삼십 성상이 흘렀다. 철없이 이 골목 저 골목 쏘다니던 소년이 어느새 은퇴를 하고, 귀밑머리 희끗한 이순의 나이를 넘어섰다. 꽃비가 축복처럼 날리는 봄날, 아득히 먼 어릴 적 추억을 찾아 구로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7호선 지하철을 타고 남구로역에서 내렸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역사를 빠져나왔다. 네 갈래로 길게 뻗은 도로는 폭이 넓어지긴 했지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옛날, 소년이 설레는 가슴으로 서울에 첫발을 디뎠을 때 이곳은 버스 종점이었다. 세월이 흘러 지하철역으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구로동 사람들의 잔잔한 삶을 바라보며 길목을 지키고 있다.

 

  도로변에 늘어선 낯선 건물들을 두리번거리며, 서울에 와서 처음 살았던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다행히도 큰 길가에서 이어지는 골목길이 옛 기억을 더듬는 소년에게 반가운 듯 손짓을 한다. 내리막길을 따라 걸었다. 다세대주택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길에는  소년이 살던 집은 온데간데없고, 아득한 기억의 공간으로만 남아 있다.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던 시절, 모든 것이 낯설던 소년에게 이곳은 외로운 땅이었다. 매일 밤 고향땅에서 뛰어노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었을 땐 어색한 공간이 싫었다. 고향 우리 집에 돌아가자고, 어머니한테 투정 부리며 때를 썼다.  그럴 때마다 “여기가 우리 집인데 가긴 어딜 가냐, 정들면 이곳이 고향인 거야”  하시며 소년의 등을 토닥거려 주곤 했다


  골목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니, 익숙한 큰 길가에 편의점과 식당, 세탁소 등 이런저런 가게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년이 어릴 적 이곳에는, 틈만 나면 들락거리던 만화방과 구멍가게가 있었고, 이발소와 쌀집이 있었다. 이제 옛 자취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 많은 세월 동안 주인을 바꿔가며 여전히 골목길을 지키고 있는 가게들이 구로동 사람들의 진한 삶의 흔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모교인 초등학교로 갔다. 교문 입구에 들어서니, 수위아저씨가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다. 오래전 이 학교 졸업생이라고 하니,

“모교를 찾는 분들이 꽤 있어요. 해외에서 오래 살다가 온 분들도 종종 있고요” 하면서 때 묻은 세월을 안고 찾아온 방문객을 반가이 맞아준다. 교정 입구는 커다란 나무와 꽃밭으로 이루어진 오솔길이 잘 가꾸어져 있고, 새로 지어진 학교 건물은 예쁜 색깔로 단장되어 있다. 담장 너머 들어선 아파트와 건물들이 다소 낯설지만, 탁 트인 운동장이 정겹다. 수업을 마치고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봄꽃처럼 예쁘고 싱그럽다. 소년이 이 학교에 전학 왔을 때, 6학년이 열두 학급이나 되었다. 다른 학년도 비슷했다. 반마다 80명이 넘는 아이들로 득실거렸다. 비좁은 교실은 책상과 책상사이가 거의 붙어 있어,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촌놈을 놀리던 반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서울 생활에 차츰 익숙해져 가던 아득한 시절의 기억들이 학교 곳곳에 묻어있다. 함께 뛰놀던 동무들의 함성소리가 운동장 저편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학교를 나와 상념 속에 발길이 닿은 곳은 가리봉시장이다. 시장입구에는 어머니가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던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이 주변에서만 세 번을 이사하면서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도 좀처럼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삼 형제의 맏이인 내 눈에 아버지의 흙 묻은 발걸음이 보이고, 어머니의 소리 없는 한숨이 들리기 시작했다. 철이 들어가면서 삶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절실하게 고민하던 시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방황하는 사춘기를 보냈다.  

  

  가리봉시장에 들어서니 왁자지껄한 사람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골목시장 현대화 사업’으로 시장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다. 좁다란 길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섰던 가게들이 말끔히 단장되어 있고, 하늘이 훤히 보이는 투명아크릴 지붕이 쾌적한 변화를 느끼게 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를 꺼내던 할머니가

 “들어오셔. 순대가 맛이 좋구먼∼” 하시며 지나가는 발길을 끈다. 출출한 김에 가게로 들어섰다. 순대와 돼지머리 고기 한 접시, 소주 한 병을 시키며, “할머니, 여기서 장사하신 지 오래됐어요?” 물었다.

“한 40년 됐지, 이 근방 두루두루 돌아다니며 길거리 장사를 하다가, 시장골목에 들어온지도 어언 삼십 년 가까이 됐구먼. 이 장사해서 아들 둘, 딸 셋을 다 키웠지.....”

내가 이곳에서 오래 살았다고 했더니 반색을 한다.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순대 한 움큼 더 가져다주며 “시장했던 모양인데, 많이 드슈” 하면서 인정 넘치는 웃음을 던진다. 할머니 이마에 비친 고단한 주름살이 오히려 아름답다.  

  

  시장을 둘러보고 가리봉 5거리로 가는 길에 들어서니 거리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가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곳은 양꼬치집, 베트남·태국 음식점, 환전소 간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고, 익숙지 않은 언어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곳의 새로운 주인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그들이,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할 변화를 만들어 가면서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70년대 이곳은 우리나라 산업역군이었던 공단의 일꾼들이 물결치던 곳이었다.  주말이면 시장바닥 주변이 공단 사람들로 들끓었다. 이곳에는 소위 ‘벌집’이 많았다. 2∼3층으로 지어진 양옥집에는 부엌 달린 좁은 방들이 수십 개씩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곳에는 고향 부모님과 오빠, 언니, 동생들을 위해 밤새 불 밝혀 일을 하던 수많은 젊은 여공들이 있었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에서 그 옛날 고달팠던 삶을 추억하며 살아가고 있을 이름 모를 그들을 떠올려본다.


  구로공단은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거리환경이 가장 많이 바뀐 곳이다. 1 공단에서 3 공단까지 이어지던 구로공단은, 이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빌딩숲을 이루고 있다. ‘수출 100만 불 시대’를 열었던 공장의 굴뚝은 사라지고 디지털단지로 탈바꿈하면서, 미래의 꿈을 찾는 젊은 넥타이 부대들이 몰려드는 곳이 되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기웃 두리번거리며 세 시간 여를 걸었다. 어릴 적 추억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골목길이며, 오래전 해외로 이민 간 친구가 살던 집, 방황하던 시절 밤늦도록 하늘을 바라보던 언덕배기...... 가슴속 아련한 흑백사진 기억들을 찾으며 걷고 걸었다. 바뀐 것은 바뀐 대로, 남아있는 것은 남아있는 대로, 잔잔한 그리움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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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옛날, 어머니는 내게, ‘정들고 살면 그곳이 고향’이라고 했다. 그랬다. 내 가슴 깊이 또 다른 고향으로 남아 있는 구로동·가리봉동 거리와 여전히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50년이나 더 늙어버린 소년의 가슴을 포근히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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