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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May 30. 2024

거실 풍경

아침이 창을 연다불암산 자락이 붉게 물 들며 서서히 세상을 깨우고 있다아내의 손길이 바쁘다압력밥솥이 씩씩거리며 돌아가고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거실에 가득하다거실 TV는 새롭지 않은 소식들을 시끄럽게 알리고 있다아버지는 벌써 거실 소파에 나와 계시다귀가 어두워 보청기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볼륨은 날로 커져만 간다열린 안방 문틈으로 또 다른 소리가 흘러나온다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신 어머니는 기독교 방송에 눈을 맞추고 계신다거실과 안방에서 소음 같이 쏟아지는 TV 소리에 온 식구가 익숙해진 지 오래이다.    

 

 아들·딸을 깨워 여섯 식구가 식탁에 앉았다아들이 후다닥 밥그릇을 비우고 제일 먼저 자리를 뜬다딸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일어선다묵묵히 식사를 하시는 어머니 아버지께 몇 마디 말을 붙여 보지만 짧은 답이 돌아올 뿐 반응이 별로 없다나이를 드시면서 두 분의 말수가  부쩍 줄어들더니 식탁에서 조차도 대화가 사라졌다식사를 마치고 차례로 자리를 뜬다아버지는 다시 소파에 몸을 누이며 TV를 켜고마른 나뭇가지 같은 어머니는 구부정한 허리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신다늘 그랬듯이 특별할 것 없는 아침이 시작된다햇살이 창문을 두드린다.     


장남인 내가 결혼하면서부모님과 살기 위해 처음으로 거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비록 작은 평수의 연립주택이었지만온 가족이 함께 TV를 보고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은 커다란 변화였다첫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거실에는 종일 깔깔거리는 소리가 흐르고손자의 재롱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시름을 잊었다직장을 다니는 며느리를 대신해서 살림을 하고날아갈까 꺼질까 물고 빨며 종일 손주를 끌어안고 살았다.     

몇 해가 지나좀 더 넓은 거실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기다리던 둘째 손녀도 태어났다거실은 또다시 아이의 웃음소리로 채워지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길이 더욱 바빠졌다이따금씩 아들 셋과 며느리들손자손녀까지 열네 명의 피붙이들이 함께 모이는 날이면 거실은 밤늦도록 시끌벅적했다아이들이 천방지축 뛰어다닐 때면 당신들이 이룬 작은 왕국을 무척이나 흐뭇해하셨다

 

어머니는 평생을 기도로 사셨다그 힘든 세월을 신앙으로 버텨 오신  어머니는 하루도 기도 없이 지낸 날이 없었다손주들 목욕시킬 때에도식사할 때도잠들기 전에도사랑이 가득한 가정이 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하셨다지금도 그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그 눈물의 기도를 먹고 우리 삼 형제가 커왔고그 사랑을 먹고 손주들이 구김 없이 자란 곳도 바로 거실이었다.   

       

올해로 여든여덟의 아버지와 여든넷의 어머니를 모시고 삼대가 함께 살아온 지도 30여 년이다그동안 거실을 다섯 번 옮겼다그때마다 거실의 풍경은   조금씩 바뀌었지만언제나 거실의 주인이셨던 두 분이 차츰 세상사 관심거리를 하나 둘 놓으시더니 웃음마저 잃어가고 있다얼마 전에는 기억력이 쇠잔한 어머니가 거실에서 사라진 사건이 있었고아버지가 크게 넘어져서 응급실로 실려 간 적도 있었다다행히 별 일 없이 돌아오셨지만불쑥 이 거실에서 두 분을 영영 뵐 수 없는 날이 올 것 같아 문득문득 두려워진다오늘 아침이 그랬듯이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아침을 맞는 일이 그저 다행이고 행복한 일이 되어버렸다.    

 

내 삶의 조물주이자 시작점이신 부모님이 마지막 자락쯤에 외롭게 앉아 계신다열네 식구의 웃어른으로 일가를 이루며 살아온 60여 년의 세월그 지난했던 삶의 뒤안길에서 마른 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잎새처럼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질 것 같은 모습으로 썰렁한 거실을 지키고 계신다.     


머지않아 이 거실에는 우리 아이들이 낳은 손주들의 웃음소리가 넘치고내 부모가 그랬듯이나 또한 그들을 보며 웃고 울고 할 것이다그렇게 세대가 바뀌고 거실 풍경도 바뀔 것이다그래도 여전히 거실은 당신들이 주고 간 사랑과 함께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공간일 것을 믿는다.

거실에 앉아 계신 두 분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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