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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우 Jul 18. 2022

어슬렁거리며 놀기

이희경의『낭송 장자』,  박태원의「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시대와 불화한 지식인들이 그 시기를 건너가는 방식 중 하나가 소요유(逍遙遊)-어슬렁거리며 놀기다. 장자가 그랬고 조선 시대 관직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그랬고 식민지 지식인들이 그랬다. 현대의 학교 밖 인문학자들도 그렇다. ‘쓸모’를 위한 삶이 우리를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그 속에서 연소되는 것이 당연한 듯 살아왔던 것에 대한 성찰로도 어슬렁거리며 노는 삶이 주목받고 있다.  ‘쓸모’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는 행위가 탐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소요하는 사람은 게으르고 생산성 없는 사람이고 공동체에 유익이 안 되는 사람일 것이다. 과연 그런가? 

    

   장자는 지식인이면서 자신의 지식을 돈으로 교환하지 않은 독특한 사람이었다. 자발적 가난을 택하고 소요유(逍遙遊)-어슬렁거리며 노는 삶을 살았다. 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군주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관리의 삶을 벗어난 그의 생활은 양식을 빌리러 다녀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나 그는 먹고사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비루함을 탓하지 않았다. 그 현실 속에서 사유하고 자유롭게 살았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관찰자가 된다. 목적 없이 걷는 관찰자에게만 보이는 진실이 있다. 그 속에 매몰되지 않고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의 소설가 박태원이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작가 자신이라 할 수 있는 서술자 구보가 경성 거리를 배회하며 관찰하고 느낀 것을 적는다.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는 구보는 군중 속의 고독, 황금을 좇는 세태에 대한 거부감, 이기적이고 메마른 인간관계, 현대인들의 속물성, 서민층의 가난과 그것으로 인한 슬픔 들을 드러낸다. 그가 관찰한 그것은 바로 식민지 치하의 1930년대 서울의 모습이자 조국의 모습이다. 실직한 지식인의 배회가 식민지 치하의 진실을 생생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돈으로 교환될 수 있는 지식과 노동만을 쓸모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은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맞는가? 돈이 되는 농작물, 돈이 되는 일, 돈을 버는 사람만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면, 삶의 맥락이 바뀌면 그 쓸모라는 것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놀이가 돈이 되는 것들을 대중문화와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나는 요즘 일을 쉬면서 독서 모임에서 놀고 있다. 그곳의 사람들은 철학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고 그러다가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선생님을 모셔서 배운다. 인문학 공부를 하고 글쓰기를 하는 우리들은 어쩌면 돈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부들이 우리를 통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관용을 배우게 하고 연대를 실천하게 한다. 얼마나 재밌는지 모른다. 이런 모임이 우리 사회에 많은 걸 안다. 나는 이렇게 공부하며 노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위기를 넘어가는데 큰 쓸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그동안 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돈이 되는 것만이 쓸모 있다고 여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돈이 되는 일에 매여 살았다. 돈이 되는 일이 재미가 있고 내적인 성장도 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일은 많지 않다. 사람을 피폐하게 하거나 고갈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그 트랙을 벗어나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고민이 여기다. 놀고 싶다고 놀 수 없는 형편.     


  생계를 위한 일의 괴로움과 가난의 고통 중에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마다 처지에 따라 다르다. 우리 사회는 가난이 불편함을 넘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분위기라 대개 일이 주는 괴로움보다 가난이 고통이 더 크다. 그리고 내 몸 하나면 가난을 감내할 수도 있겠지만 자식과 다른 식구들이 받는 고통을 생각하면 나 하나 좋자고 가난을 선택할 수는 없다. 가난은 큰 고통이고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장자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장자의 자유로웠던 삶을 참고할 수는 있다. 가난의 고통과 자유를 저울에 놓고 자신의 삶에서 균형점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처지와 형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생애의 어느 주기에 선택하느냐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운 중년이나 직장에서 은퇴를 앞둔 사람들은 선택이 조금 더 쉬워질 수도 있겠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일을 하며 어슬렁거리며 놀고 싶다. 그랬을 때 내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형태가 어디까지가 될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가다 보면 다양한 길이 나타날 것이고 가다가 멈출 수도 있겠지. 어쩌면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좀 더 놀아보고자 한다. 이 삶이 나와 이웃과 세계에 해롭지 않은 다른 쓸모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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