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우 Jul 07. 2022

가난의 슬픔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 함민복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 함민복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자장면을 시켜 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 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시인은 자신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하는 형님을 도우며 가슴이 덜컹거린다. ‘연약한 반죽’으로 자장면을 만들며 명랑함을 잃지 않는 가난한 부부를 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 감정들은 가난함에서 오는 슬픔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그 슬픔이 고통이자 안타까움이고 대상에 대한 연민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난한 시인의 형과 자장면집 부부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사는 곳은 방이 좁고 한 개나 두 개밖에 안 될 것이며 씻는 데도 불편할 것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필요한 것들, 가령 컴퓨터나 자전거를 살 때마다 중고 상품을 알아볼 것이다. 아이들은 어쩌면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시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들이 낯설지 않다. 내 주위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부모가 가난했고 언니들이 가난했고 그들이 사는 곳의 이웃들이 가난했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우리 집에서 고등학교까지는 6km 거리였다. 읍내에서 집으로 가는 막차는 밤 9시 전후쯤이었다. 고3이 되면 학교의 독서실을 이용할 수 있어 밤늦게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려면 읍내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나는 읍내에 사는 넷째 언니네 단칸방에 끼어서 살게 되었다. 언니는 장롱을 앞으로 당겨서 장롱 뒤로 좁은 공간을 만들어 내가 지낼 곳을 만들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가 새벽에 돌아와서 잠만 자는 자리였다.   

  

  그렇게 고3을 보내고 서울로 대학을 왔고 둘째 언니네 집에서 살게 되었다. 언니네 집은 신당동이었는데 달동네였다. 그렇게 높은 곳에도 집을 지을 수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언니네 집 방 두 개 중 하나는 내가 썼고 언니네 네 식구는 한방에서 지냈다. 조카들이 어려서 다행이었다. 그 집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서울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 동네의 골목은 미로처럼 좁고 구불구불했고 더 많은 방을 만들기 위한 특이한 구조의 집이 많았다.    

  

  내 삶엔 가난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살림은 낡았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물건보다 실질적인 쓸모가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옷이든 신발이든 가방이든 기본 아이템들이다. 무난하고 유행을 타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무난한 스타일은 가난한 생활에서 비롯된 취향이다. 그리고 여유가 있을 때는 나눠야 한다는 강박감 같은 것이 있다. 가난이 주는 불행이 뭔지 알기 때문에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편치 않다. 그 마음 때문에 시민단체와 여러 재단에 후원금을 보낸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 구조를 바꾸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모이면 언니들이 나에게 장롱 뒤의 좁은 공간과 방 한 칸을 내줘서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줬던 그런 기회와 위로가 될 수 있음도 안다.      


  가난이 불편함일 뿐 불행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난이 단지 불편함일 뿐이고 불행이 되지 않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사람마다 처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생존의 조건이란 게 있을 거다. 그런 조건을 말하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만족할 줄 모른다고 말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가난했던 사람들이, 아팠던 사람들이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 공감하고 돕는 경우를 많이 봤다. 매체를 통해 우리가 보고 듣는 아름다운 이야기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 얘기가 아니던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난을 없앨 수는 없지만, 가난으로 불행해지는 사람이 적어지게 할 수는 있다고 믿는다. 시인의 형과 자장면집 부부와 나의 언니들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처럼 그들을 향해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에.


작가의 이전글 작은아버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