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식 07. 똑같이 네 발로 걷는 다른 얼굴의 친구들, 불혹 잘 넘겼어?
우리는 서로를 친애하면서 해를 끼치고 밥을 나눠 먹었다. 각자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왔는지 모른다. 한 녀석은 경기 북부의 한 골목길에서, 한 녀석은 지금은 사라진 홍대 거리의 한 가게에서, 한 녀석은 아비가 실어다 준 가구와 함께 1톤 트럭으로 올라온 기숙사에서 머물기 시작했을 뿐이다. 동고동락한 지 십 년이 넘어가면서 통성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뭘 원하는지… 잘 모른다. 이런 걸 하고 싶은 걸까. 배고프구나. 사정이야 모르겠지만 퍽 위로하고 싶은 거지? 대강 눈대중으로 파악할 뿐이다. 그쯤이어서 좋고, 그쯤이어서 선선한 세 존재는 한 번 크게 아픈 적 있고, 그것을 가리켜 ‘미음을 먹던 시절’이라고 불러본다.
A: 무병장수를 비는 마음으로
친구가 필요해 보이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친구가 된 A는 화내는 법을 몰랐다. 지금도 미숙하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나를 A는 단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다. A는 눈맞춤을 잘했고 때때로 정력적이었고 D가 나를 때리는 시늉을 하면 와서 말려주곤 했다. 은근히 바보인 척 천재인 중개자였달까. 가끔 여자친구를 만나러 잦은 외출을 하곤 했는데, 우리는 딱히 성적으로 서로에게 흥미가 없었기에 늦게 귀가해도 그러려니 했다. 몇 번, A의 여자친구들이 집 문을 두드리곤 했다.
어느 날, 일 년에 한 번 먹던 소고기미역국을 A가 몰래 훔쳐 먹은 사건이 일어났다. 고기가 절반 가까이 사라져 있었다(A는 삼겹살도 좋아했다). 열이 받은 나머지 물폭탄을 던지고 화장실에 여러 시간을 가뒀는데, 그는 울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그때 뿜었던 분노의 에너지만큼 A의 영혼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가차 없이 A를 몰아붙였고, A는 그렁그렁 상처받은 얼굴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화날 법도 한데. A는 언제나 나보다 어른이었다.
이제 소고기미역국을 할 때 좋은 고기와 참치액젓을 넣어 고품격(?)의 생일상을 차리는 여유가 생겼지만, A는 더 이상 육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생고기를 먹을 만큼 위가 이제 튼튼하지 않는 건지, 꽤 맛있는 끼니를 먹게 된 후 더 이상 생식이 당기지 않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친구로서 내가 무척 잘못했다는 것만 송곳처럼 기억에 새겼다.
가끔 “이제 늘 먹던 거만 먹고 싶은 거야?” 물어보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곤 하는데, 식탐이 많은 A는 음식아닌 것을 삼켰다가 수술을 한 적 있다. 24시간을 토만 하는 A와 손을 잡고 병원에 간 날, A는 어디가 아픈지 말하는 대신 ‘꾸웨엑’ 유령 캐스퍼 같은 토사물만 구름구름 뱉어냈다. 엑스레이와 MRI를 찍고 난 후 A의 배 속에 돌잔치 때 무병장수를 의미하는 그것, 실이 한 뭉태기 든 것을 발견했다. A는 오랜 수술 끝에 내장을 찌르던 실에서 벗어나 퇴원할 수 있었다.
A가 전염병이라도 걸린 줄 알고 초음파 검사를 할 때였다. 나는 A가 운명을 달리한다고 생각하고, 눈물 콧물을 폭포수처럼 뿜으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A의 손발을 잡고 있었고, 차가운 기계가 그의 배를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A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챈 듯했다. 그건 뭐랄까. 눈사람이 ‘봄이 오는구나’ 하고 아는 표정이었다. 이제 좀 그만 우는 게 어때? 못생긴 얼굴 더 못생겨졌다고. 오늘자 인생 씁쓸한 게, 연어가 당기는군. 이봐, 괜찮으니까 국물 그만 흘리고 그것을 준비하도록. 알겠다고, 오래 살겠다고. 좀. 실을 삼켰던 A는 올해 칠순을 넘겼다.
B: 크리스마스의 악몽 아니, 선물
뒤태가 워낙 예쁘다는 이유로 A는 B의 다리를 자주 걸곤 했다. A는 아저씨 같은 구석이 있어서 시비를 자주 걸었고, 새초롬한 B 역시 싸움을 잘 받아주고 진심으로 싸웠다. 화끈한 아저씨들이었다. B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근하기 전에 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성실한 직장인이었다(지금은 정년퇴직하여 요양 중이다).
요로결석은 친구인 내가 갖고 있는데, 아침마다 물을 대접으로 받아 퍼마시고 드라마와 영화를 볼 때마다 그윽한 눈빛으로 ‘무엇이 중헌디’ 하는 모종의 협박을 쏘아 보냈다. 셋 중에서 가장 외로움을 잘 탔다. 힙스터의 성지 홍대에서 자란 그는 오후 2시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고, 나는 기꺼이 그의 술친구가 되었다. 소맥을 세 잔쯤 같이 부딪쳤던 것 같다. 그가 열다섯 살 무렵, 내가 스물아홉 해 되던 봄날이었다.
무던한 A와 달리 B는 소리에 잘 놀랐다. 우리는 싸울 때 B가 놀라진 않는지 눈치를 한번 살폈다가 다시 싸움을 이어가는 고수의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주로 이유 없이 싸웠다). 벽 짚고 점프를 잘했고 조류도감을 자주 보곤 하는 그는 심장이 심히 다정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철야 마감을 하고 아침 8시쯤 집에 도착한 나는 D와 함께 B가 심상치 않음을 발견했다. B는 평소와 달리 세차게 호흡했고, 한쪽 다리를 절었으며,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꾸만 숨어들었다.
“나 건들지 마. 좀 있다 보면 나을 거야.” 그건 알겠는데, 나도 심장이 심히 다정해질 것 같은 위태로운 기분으로 병원을 들렀더니, 친구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통보를 받았다. 대형병원에 가서 생존률이 희박하다는 선고를 받았고, 스위스에 갈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B의 생명권은 그에게 있겠다는 모종의 어리석음으로 우리는 B를 업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B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고통을 호소했다. D와 나는 멘탈이 붕괴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B와 함께 동그랗게 둘러앉아 기이한 사랑의 인사를 반복했다. 진통제를 맞은 상황이었지만 B의 심장은 수레처럼 덜커덩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A는 꾸준히 B의 뺨을 어루만졌고 우리는 그에게 “사랑해.” 토닥거리며 수면 음악 재생과 함께 뽀뽀 세례를 부었다. D는 "잘가, 친구."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그때였다. B는 허공 한쪽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믹서기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쯤이었을까.
산타가 퇴근하신 다음 날이 오고 있었다. 청명이 밝아왔다. 그날 뒤 우리는 B를 기적의 사나이, 돌아온 탕자, 죽지도 않고 또 돌아온 놈, 미친놈, 희한한 놈, 지옥에서 돌아온 녀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셋 중에서 미음을 가장 뜨겁게 마셨고, 죽다 살아온 뒤로 ‘너네가 세상사를 아느냐’ 하는 신선의 표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어른스러워져서 곗돈 관리는 주로 B가 하고 있다.
C: 예지력 강하고 깡다구 센 친구들 옆에서
스물일곱해를 살던 여름, 모로 누워 자고 있는데 A가 전날에 과음을 했는지 나의 머리맡에서 거대한 토를 했다. 정확히 왼쪽 귀에 발사했다. 당시 나는 하루에 한 끼를 먹으며 졸업작품을 쓰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마지막 4학년을 화려하게 보내고 싶었고 반은 미쳐있었다.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지만 A가 내 신체에 직방으로 토를 할 만큼 경우 없진 않은데… 몹쓸 놈, 많이도 토했네. 대관절 기이한 친구의 행동에 귀를 닦으며 그날 역시 한끼를 먹고 핫식스를 먹고 뭔가에 열중했다.
다음 날부터 이명이 들렸다. 흔히 면역력이 약해졌을 때 두통과 근육통, 구토 증세와 함께 찾아오는 병이었고 일주일 24시간 내내 들렸던 뱃고동 소리에 정신이 별나라로 갈 뻔했다. 왼쪽 귀가 그리될 줄 알고 미리 토를 해 준건지 가끔 A는 심령이 들렸을 때 뱉어낸다는 형상물로 모종의 예언을 구사한다. 약간 더럽다.
새벽에 무언의 텍스트를 쓰고 있던 시절, 나의 곁에는 개코와 찌찌가 있었다. 하나는 왼쪽 배를, 하나는 오른쪽 배를 띄워 나의 파도가 나를 넘어서지 않도록 나라는 정신의 배가 중심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등대가 되어 주었다. 그 배 안에서 미음을 잘 삼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는 흰 죽을 먹던 세 시절을 지나고 있다. 우정의 수평선은 잘 흐르고 있다. 셋은 노년의 바다를 향해 함께 항해한다. 아, 그런데 나는 아직 중년이구나. 매우 잘 늙도록 하거라.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