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감정의 크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by 책밤

새끼 돼지 한 마리가 양들 사이에 숨어 들어 풀을 뜯고 있었다. 며칠을 그렇게 생활하던 새끼 돼지는 양치기의 눈에 띄어 붙잡히게 되었다. 새끼 돼지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양들은 소란스러운 새끼 돼지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양치기는 때론 우리를 붙잡지만 저렇게까지 야단법석을 떨지 않아.”
그러자 새끼 돼지가 말했다.
“양치기가 너희를 붙잡는 것과 나를 붙잡는 것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 양치기는 너희에게 털과 젖을 얻지만, 나에게는 맛있는 고기를 얻는단 말이야.”


양들의 처지에서 양치기는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지럽게 자라난 털 뭉치를 말끔하게 정리해 주는 다소 거친 미용사쯤 될 겁니다. 그러니 양치기에게 붙잡히는 것은 잠시 무리 지어 다니는 일을 멈추고 쉴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저 놀란 마음을 추스른다면 비명을 지를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새끼 돼지의 입장은 다릅니다. 양치기가 채식주의자가 아닌 이상 그에게 새끼 돼지는 ‘고기라는 식량’일 뿐입니다. 그러니 양치기에게 붙잡힌 새끼 돼지는 비명을 지르며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이상, 섣부르게 남의 감정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양들의 휴식 시간이 새끼 돼지에게는 참극인 것처럼 같은 상황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생각이 나와 같을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은 오만한 착각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글을 실어 보냈습니다.

내가 숲속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자지러지듯이 우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에게 다가가 그 이유를 물으니 나무 아래에서 밤 한 톨을 주웠는데 어떤 사람이 빼앗아 갔다고 말하더구나. 세상에 이런 일을 당하고도 그 아이처럼 울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벼슬과 권세를 잃은 사람들, 재물의 손해를 본 사람들, 자식을 잃고 죽음과도 같은 슬픔을 겪은 사람들 모두 초탈한 사람의 눈에는 한 톨의 밤을 잃은 아이와 같을 것이다.

어른의 관점에서 밤 한 톨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간식거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달콤한 맛을 선사해 주는 밤 한 톨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었습니다. 만약 아이에게 위와 같은 사정을 듣지 않았다면, 그 비통한 울음소리는 부모를 잃었거나 집에 불이 나지는 않았을까 짐작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상대의 감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일은 상황에 대한 몰이해로 이어집니다.

정약용은 편지 말미에 ‘초탈한 사람의 눈에는 어른의 시련이나 아이의 시련이나 모두 매한가지이다’라는 뜻을 ‘밤 한 톨’에 비유해 표현했습니다. 그 의미를 마음에 새겨봅니다. 그리고 마흔에는 남의 울음소리에 담긴 뜻을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기로 다짐합니다. 그의 고통을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정도 일로 좌절하다니, 마음이 무른 거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별일 아닌 일’이 그에겐 ‘별일’일 수 있기에. 그가 흘리는 눈물의 크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저마다 대성통곡할 만한 잃어버린 밤 한 톨이 있습니다. 또 벅차오르는 환희를 느낄 밤 한 톨도 있습니다. 그러니 상대가 손에 쥔, 아니면 잃어버렸다고 하소연하는 밤 한 톨이 아무리 작아 보이더라도 세상에 다시 맛볼 수 없는 귀중한 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마흔에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삶에 무게를 더하는 이야기>

하루는 적당한 크기의 종이가방을 찾을 수가 없어서 집안 곳곳을 뒤졌습니다. 그러다가 꽤 오래 들여다보지 않은 수납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문을 열었는데, 종이 뭉치가 쏟아져나왔습니다.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누르고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종이지?’라는 생각에 그중 한 장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 선생님이 매주 보내준 ‘주간 계획표’였습니다. 계획표 전면에는 같은 반 아이들의 단체 사진이 있었고, 매일 어떤 점심과 간식을 먹었는지, 그리고 무슨 활동을 했는지 적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내가 말했습니다.


“내 보물! 날짜별로 잘 정리해 둬요.”


이어서 아내는 종이를 모아둔 이유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한낱 종이 같지만, 단체 사진 속 딸아이를 찾는 재미와 매주 커가는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어서 버릴 수가 없었다고. 그렇습니다. 아내에게 그 종이는 기쁨을 안겨주는 밤 한 톨이었습니다.

마흔에는 늘 새로운 것을 접하지만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점점 줄어듭니다. 이제는 내 삶을 스쳐 지나는 것들에 관심을 쏟기보다 진짜 소중한 밤 한 톨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게 나만의 수납장에 쌓이는 종이 뭉치가 인생을 기쁨으로 채워줄 겁니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3화‘돕는 기쁨’은 함께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