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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림이 언니 최윤순 Jan 08. 2025

주부(主婦)는 기획자다


 


  주부는 가족의 건강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의식주를 담당하는 기획자다.

  누가 진심으로 인정해주지 않아도 꿋꿋이 차분하게 그 일을 해 나가고 있다.

  언제나 가족 식사를 가장 먼저 머릿속에 생각하는 주부들!

  눈을 뜨자마자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는 나도 오늘은 무엇으로 아침을 준비해야 되나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며칠 전에 사 둔 브로콜리를 쪄야겠네. 돼지고기와 표고버섯을 살짝 구워서 여름 텃밭에서 따온 깻잎 장아찌 싸 먹으면 되겠구나! 가족들은 주부가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계획하는 줄 모른 채 반쯤 감긴 눈으로 밥상을 마주한다. 언제나 식사 거리를 기획하고 가족의 건강도 생각하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 소진과 유통 기한도 챙겨야만 하는 주부들!





  펑펑 놀고 있는 한량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머릿속은 식구들의 건강과 음식 준비로 가득 차 있다. 먹거리도 어느 것으로 어디서 살 것인지 생각한다. 살림을 야무지게 하지 못하고 요리하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도, 밥알이 톡톡 튀는 주꾸미와 오징어, 꼬막 등 제철 음식을 식구들에게 보여주고 맛보게 하려고 챙긴다.

  하물며 살림 좋아하고 요리도 잘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꽉 차 있을 듯. 주부들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려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가족들도 챙길 수 있다. 내 마음이 축축 처지고 만사가 귀찮으면 가족들의 건강은 완전 뒷전.


  우리 부부는 적당한 무게감 있어 포근하게 눌러주는 솜이불을 좋아한다. 솜은 적당한 시기에 틀어줘야 한다. 솜을 틀면 고온으로 살균 소독도 되고 먼지도 떨어져 나가서 더 깨끗하고 포근한 이부자리가 된다. 솜을 어디서 틀 것이며 어느 가게가 비교적 싼 지 가성비도 따져가며 적당한 시점과 가게를 물색하는 것도 주부의 몫이다.



  주부들 가슴속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육아와 원, 원에 관한 정보다.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 선택, 병원도 한 곳만 주야장천 다녀야 할지, 병원 투어라도 해야 할지. 정답 없는 선택을 끊임없이 해야만 하는 주부들!  

  아이들이 커 가면 학원 선택은 더 커다란 산이다. 부모가 아니라 아이들 의견까지 수렴해야 하니 그것 또한 무거운 짐이다. 그 점에선 주부들은 나름의 정보력을 이용해 최고의 전문성을 발휘한다.


  나는 딸들이 결혼해 손주까지 낳았는데도 손주 돌봄에 참여하다 보니 각종 일에 관심이 많다. 자식들과 양육에 대한 생각이 달라, 선 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 자식이면 내 식대로 해결하면 될 텐데…….

나의 교육 철학이 어쭙잖게 보이거나, 잘못된 정보일 수 있어 말하기조차 조심스럽다.



  

  또한 가정경제에 가장 큰 관심거리인 집사는 문제도 남자보다는 여자들 몫이 크다. 물론 이런 중차대한 일은 부부가 합심해서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직장 일에 시간이 넉넉하지 못하거나 그런 일을 귀찮아 할 수도 있다.

  주부들이 그냥 앉아서 수다만 떠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나름의 정보력이 있다. 그들의 정보를 잘 챙겨 들으면 어느 정도 경기 흐름도 알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보인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주부들은 치열한 경쟁과 머리싸움으로 가정 경제를 이끌어가는 역군이다. 그들이 어떤 상상을 하며 어떤 부류와 어울리느냐에 따라 각자 삶의 방향이 정해지기도 한다. 결국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주부 자리는 쉼도 휴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연금도 정년퇴직도 없다.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연금이 아니고 언젠가 내 것이 될 수 있지만, 자식들 생각하며 두루뭉술하게  상상만 한다. 사람은 기운보다는 기분으로 살아간다고. 나는 이른 아침 기운 차리려고 힘없는 발걸음을 주방으로 향한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먹으면 기분도 좋아지겠지! 끝까지 주부 자리 내려놓지 못하고 남편한테 도와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하지도 못한 채 지켜내고 있다. 요즘 시간이 널널한 남편에게 가사 분담할 것을 요구하면 함부로 남의 중요한 자리 뺏을 수 없다며 웃어넘긴다. 손주 돌봄 끝내고 돌아올 때, 식사 시간이 되면 오늘 반찬은 무엇으로 할까?

  김치 찜? 아니면 김치찌개로?

  이미 머릿속으로 밥상을 차리고 있다.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결정을 해야만 하는 나 같은 주부.

  그래도 해야지 뭐 평생을 이렇게 기획자로 사는 주부들!

  만세 만 만세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 뭔가 뒤가 켕겼다. 내 생각이 우리 시대에는 어느 정도 일반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세대를 거르다 보니 내 주변에 아주 가까운 사람들은 요리도, 살림도, 육아도 거뜬히 하고, 재테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남자지만 기획자적인 성향으로 의식주에 관한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며 세상은 내가 본 게 다가 아니구나!

  지금 나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젊은이들의 생활을 보며 주변만 보고 함부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 내 생각과 선입견을 바꿔야겠구나!





  어느 날 내 생각의 오류를 발견하고 큰딸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딸은

  “엄마? 주부가 꼭 여자일 필요는 없잖아요? 요즘 남자 주부. 자기 일도 철저히 하며,  가사 일도 제대로 하는 남자 주부가 많아요. 누구라도 집안일에 관심이 많고 즐기는 사람이 하면 돼요.”

그렇지!

딸 말을 듣고 사고를 확장하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유명 셰프들이 운영하는 YouTube도 많아서 의지만 있으면 요리도 척척해낸다. 인생의 큰 문제인 집을  때도, 적절한 시점을 찾고, 자금 마련 방법을 고민하고 공부한다. 구입한 뒤에는 어떻게 리모델링을 해서 가족의 행복한 공간을 꾸밀지 상상하며 설렘으로 가득한 주부 남들을 직관하게 된다. 오래전 나와 남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예금이 불어나는 통장을 보며 집을 살 꿈을 키워나갔다.

   더 이상 ‘주부는 기획자다.’라는 나의 구태의연한 의견으로 능력 있고 즐기는 주부 남자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주관적인 의견이므로 일반화시킬 수 없음을 알고, 나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주부라는 직업도 라이프 매니저, 생활 기획자 등으로 폭넓게 정의를 내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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