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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림이 언니 최윤순 Jan 25. 2023

명절과 여자의 삶.



  결혼한 지 38년째다.

이렇게 돌이켜보니 친정집에서 생활했던 것보다 더 길고 지난한 세월을 시집와서 보냈다. 항상 명절 때가 가장 큰 고통이었으나 이 속없는 ‘나’라는 사람은 시댁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친정집에 온 형제자매를 볼 수 있다는 마음에 설레었다. 그 알량한 기회의 끝자락이라도 잡아보겠다는 신념으로 힘든 귀성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렇게 신나게 다녔다. 나는 둘째 며느리이나 우리 시댁은 종갓집이라 차례음식 준비가 엄청났다. 물론 모든 준비를 시어머님과 형님이 해오시지만 그래도 10시간 이상씩 차 타고 가서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음식 준비하는 것은 항상 문제였다. 그나마 멀리서 왔다는 이유와 시어머님의 선심과 배려로 허락이 떨어지면 명절 전날 친정집에 찍듯이 다녀왔고 편안하게 널브러져 친정에 머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런 친구들이 많이 부러웠다.


  남편이 건설 현장 감독으로 일한 관계로 부산, 김해, 김천, 대전 등 지방 발령이 잦았다. 두 딸이 어렸고 명절에 시골 가는 기차표를 줄 서서 살 엄두도 못  냈다. 나와 두 딸은 수원까지 전철 타고 가서 역방향인 서울 역 가는 기차표를 사고 무조건 호남선 열차를 무임승차했다. 오산역, 천안역, 대전역 등에서 내려 남편과 도킹해서 그렇게 시골을 여러 가지 형태로 최선을 다해 가야만 하는 곳으로 생각하며 다녔다. 그렇게 어렵게 다닌 명절 고향 길은 고행 길이었지만 그래도 시골태생인 우리 부부, 아니 나에게는 향수에 빠질 수 있었던 꽤 괜찮은 여정이었다.


  일단 시부모님, 형님, 아주버님, 동서, 조카들 모두 모이니 차례 음식 준비와 10끼 이상 대식구 식사 준비하는 것과 설거지가 제일 힘들었다. 그렇게 30여 년을 다녀도 거짓말이나 꾀를 피우며 명절에 가지 않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성실하게 다녔다. 대한민국 고 3 학생을 둔 학부모와 학생은 모든 것이 용서되는 그런 시절에도 우리 두 딸은 귀성길에 합류해야만 했다. 우리 남편은 “고3이 무슨 대수고, 무슨 큰 벼슬이냐?”며 명절에 빠지는 걸 용납하지 못하고 ktx 열차라도 타고 당일치기 시골 방문을 강요했다. 그럴 땐 딸도 어미도 가슴이 미어지고 피멍이 들었다. 애들은 모름지기 보고, 듣고, 경험한 대로 커서 훗날 우리가 대접받을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하며 그렇게 지키라며 강요받아왔다. 하지만 나는 우리 딸들은 그렇게 30여 년을 넘게 시골 할머니 댁에 다녔어도 그런 마음이 세포에 단 1% 도 저장되지 않은 것 같아 ‘도루아미타불’이 된 듯 허망했었다.


  지금이야 남편이 고집 피우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고집쟁이 영감탱이’라고 부르고 ‘삐친 쟁이 할망구’라며 입을 삐죽거리고 서로 비난하고 투덜대며 딸들과 흉도 본다. 그때 그 시절엔 속 시원히 마음 터놓고 말도 못 하고 눈물을 삼키며 속울음을 우는 걸로 끝나다 보니 가슴에 응어리가 커졌다.


 드디어 5년 전부터 나는 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위를 보고 나서도 근 5년 동안은 예전과 똑같이 추석, 설날 그렇게 밀리는 귀성길에 합류했다. 명절을 마치고 아주 지친 몸과 마음으로 귀한 딸, 사위, 손주들 금쪽같은 내 새끼들을 손님으로 맞이해야만 했다. 자주 보며 가까이 살지만 그래도 명절은 또 다른 느낌인지 할머니 언제 오냐며 손주들 전화가 빗발쳤다. 또 힘든 귀경길을 뚫고 집에 와서 귀한 내 새끼들 뭐라도 준비하려는데 명절 끝이라 시장이나 마트에 살만한 물건이 없어서 곤혹스러웠다. 음식도 잘 못하는 나에게 이건 또 하나의 숙제였다. 그렇다고 미리 야무지게 음식 해놓고 가는 그런 여자, 장모님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제는 남편이 허리가 아파서 장거리 운전이 어렵고 2월 구정 때는 눈보라 치는 새벽길에 운전하는 것도 위험하고 편치 안아 설날은 안 가고 싶다고 형님과 아주버님께 정확히 말했다. 다행히 우리 의견이 받아들여져 1년에 한 번 합동 제사 때는 필히 참석하고 추석은 한 주 전에 모여서 성묘도 하고 차례도 모시기로 합의를 봤다. 코로나 때문에 1년은 건너뛰었고 작년과 올해 추석 1주일 전에 다녀오니 세상 한 가지고 우리 손주들이랑 지낼 수 있어서 무지 좋다. 형님과 동서도 추석은 명절이 아니고 1년에 1번 모이는 우리만의 모임이니 앞으론 모임에 빠져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고 조카들도 참석하지 않고 3 가족만 단출하게 모이기로 했다.


  나는 딸만 둘이고 우리가 시골에 차례 지네로 내려와야 만하니 자연히 딸들은 시댁에 먼저 가고 친정집은 훗날에 오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딸도 사위도 손주들도 나에겐 아주 큰 손님인데 거의 명절 휴가가 끝나고 정리할 단계에 난 뭔가 일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어느 날부터 나도 명절 당일에 딸 사위 손주들과 함께 명절다운 명절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아들 둔 사돈네가 먼저 챙겨지고 딸 둔 부모는 뒷전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작은 딸에게 내 진솔한 생각을 말하는데 가슴 저 편에, 숨겨진 여자의 한이 밀려 나와 눈가에 촉촉이 맺힌 눈물을 그만 딸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모습은 어떤 말로도 대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딸은 사위에게 자기도 딸이 있는데 친정엄마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면 어떻겠냐고 어필했다. 그래서 두 딸은 사위들과 이 사실을 공론화해서 추석은 명절 당일 날, 친정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설날은 내가 숙제를 미리 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명절 하루 전날 모이기로 했다. 다행히 두 딸  시댁이 시골이 아니고 가까이 사시고 큰 딸 시댁은 신실한 기독교 집안이라서 차례를 안 지내고 둘째 딸네는 성당에서 합동차례를 지내는 집이라 이 일이 무탈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추석에 여유 있게 성묘도 하고 남은 농사일도 도와드리며 정담을 나눌 시간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내가 혼잡을 피해 추석을 보내자고 고집한 이유를 형님 부부에게 말했더니 남편도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냐며 처음으로 내 속마음을 알아차렸다고 깜짝 놀랐다.


  내가 젊었을 때 항상 시댁위주로 모든 행사가 진행되어 온 것에 울분이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여자에게 아니 나에게 컴퍼스로 큰 원을 그리면 구심점은 항상 시댁이었다. 그 큰 원안에 모든 일이 시댁 위주로 이루어지고 반지름 컴퍼스가 그리는 가장 먼 끝자리에 노쇠한 친정 부모, 내가 보고 싶어 안달 나는 형제자매들이 그려졌다. 이 사실은 나에겐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심정이었다. 그래서 목을 길게 빼고 눈과 귀는 항상 친정집 쪽으로 활짝 열어 놓고 몸은 시댁 부엌에서 일해야만 했던 기억, 그런 여자의 삶이 정말 싫었다. 어떨 땐 시댁과 친정이 완전 다른 지역이어서 두 집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부모님 사랑 흠씬 받고 향수 어린 음식 널브러진 마음으로 받아먹고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친정집이 지척에 있어서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해하기도 했다.


  이번 설 명절엔 우리 집 세 가족이 모두 모여 왁자지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두 집 손주들이 감기와 수족구가 걸려서 함께 할 수 없어 따로따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설날 점심 먹고 작은 딸네와 6명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나니 이 또한 명절날을 호사스럽게 보내는 기분이고 몸과 마음이 충전되어 힐링받는 느낌이라 모두 흡족해했다. 큰 딸네는 그 다음날 와서 한 끼만 울 집에서 먹고 한 끼는 외식하자는 딸의 간곡한 청으로 무조건 ok 해서 몸도 마음도 수월했다. 어쩔 수없이 한 방이 아니라 두 방에 끝냈지만 내 마음대로 해서 만족스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편이 그렇게 고집하며 지켜왔던 명절 때 고향 아니 부모, 친지 방문했던 것이 딸들 세포 속에 조금은 저장되어 우리 부부를 무한이 신뢰하고 따라주는 것이 바로 우리 부부가 대접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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