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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림이 언니 최윤순 Sep 27. 2023

여름날 최애 음식



    내 안의 좋은 기억 속의 사람을 소환하는 마법 같은 음식이 있다. 

무엇보다도 음식은 같이 먹고 정을 나눴을 때 더 돈독한 무언가로 이어지는 끈이 되기도 한다. 

날마다 급식을 함께 먹고, 차도 마시면서 하루의 반 이상을 함께 보냈던 선생님. 

그녀와 나눴던 많은 시간, 공간이 떠올랐다. 이런 염천에 날마다 식사를 준비하는 주부는 참 고역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특별한 사람이 생각났다.


  시민 주말농장에 폭염으로 제때 못 갔다. 

몇 주째 열매를 내주지 않더니, 늙은 오이며 보라색 가지가 푸짐하게 달려있다. 

지루한 장마와 곳곳에 홍수로 채솟값이 금값이 되었다. 인간은 편리할 때, 시간 날 때, 힘들지 않을 때, 텃밭 채소 사냥에 나선다. 그러나 텃밭 생물들은 인간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묵묵히 제 할 일을 찬찬히 해내고 있음에 그저 고맙고 미안했다. 세 평 남짓한 땅에서도 제법 많은 야채가 자라주고 있다. 가지, 오이,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 등. 여전히 진한 향을 앞세우며 깨끗하고 널따란 잎을 자랑하고 있는 들깻잎. 까마중 열매, 해바라기꽃까지 골고루도 열어주고 피워내고 있다. 수확한 것이 너무 많아서 딸 집에 반 나눠줬다. 그러고도 푸짐하니 양이 상당했다. 그렇다고 옆집에 나눠주기는 모양이나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모두 끌어안고 어떻게 먹을 것인지 궁리하고 있었다. 어제저녁은 늙은 오이를 한 조각도 허투루 버리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도토리묵밥을 만들었다. 새콤 달달하고 신선한 맛에 우리 부부는 허겁지겁 맛나게 먹었다. 오이로는 기껏해야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가 좋은 오이소박이, 만들기 쉽고 속까지 시원하게 꿰뚫을 듯 새콤한 오이 미역냉국, 아작아작한 소리와 저장성이 좋아 두고두고 오래 먹을 수 있는 오이장아찌 만들기만 생각했다.



 

 편안한 사람들과, 조금은 편안한 공간, 편안한 시간인 방학 동안에 함께 여유로운 때를 보냈던 시절이 그립다. 그리고 여름방학마다 도시락을 싸고 조별 근무를 하던 때가 생각났다. 내 차로 카풀을 했던 사서 선생님이 있었다. 그녀는 아가씨였지만 참 배려심과 손재주가 특출 났다. 나에게 부족한 컴퓨터 작업, 방학 중에 하는 영어 캠프 준비로 힘들어할 때, 항상 동참해서 참신한 아이디어도 주고, 학생들과 하는 수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렇게 어려울 때 도와주고 자매처럼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는 마음 따뜻한 그녀가 여름방학 때마다 싸 왔던 음식이 떠올랐다. 그녀는 완도가 고향이어서 주변에 해산물이 기본적으로 많았다. 그중 한 음식이 늙은 오이 바지락 들깨탕이었다. 나는 오늘 아침 오직 그때 그 맛을 떠올리며 그 음식을 만들었다. 꽤 맛이 좋았다. 한여름 입맛 없을 때 만들기도 쉽고, 영양도 좋았다. 특히 손주들도 좋아할 음식일 거라는 예감이 들어 기분이 더 좋았다. 어떻게든 버릴듯해 보였던 금값 채소를 버리지 않고 먹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지금은 멀리 있는 학교에 근무하니 만나기 어렵다. 가끔 소식이 궁금해 전화하려다가도 바쁠까 봐 그냥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사실 나는 시장에서 늙은 오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이라면 생생한 맛에 날 것으로 먹거나, 오이 특유의 향이 가득한 싱싱한 오이만 생각하며 좋아했다. 그런데 늙은 오이가 색다른 맛을 내는 음식으로 탄생하다니! 특히 늙은 오이 바지락 들깨탕은 바지락 대신에 다른 해물 새우, 홍합, 전복 등 내가 아는 많은 것으로 다 대체할 수 있어 좋다. 고기 좋아하는 사람은 소고기뭇국 끓이듯이 바꿔서 요리해도 된다. 늙은 오이도 감자, 토란, 무 등으로 바꿔서 요리할 수 있고 들깻가루는 참기름, 들기름 파는 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세상에 필요치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제 역할을 가지고 소리 없이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단지 사람들이 어떤 채소는 어릴 때 좋아하고, 어떤 채소는 늙수그레한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은 완전히 성장을 다 마친, 최고의 순간을 맞을 때 좋아한다. 단지 내가 몰랐고 그런 음식을 먹어 보지 않았거나 기억나지 않을 뿐이었다. 늦게 발견했지만 만들기가 쉬워서, 맛이 탁월해서, 아무 재료로 대체할 수 있어서 올여름 나의 최애 음식이 될 것이다.


  나는 방학 중인 그녀에게 편하게 전화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전화기 속에서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내 가슴은 설렘으로 출렁였다. 그동안 미뤄왔던 이야기로 옛 시절을 기억하며 한참 통화했다. 선생님도 노력해서 주말에는 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내가 더 뿌듯했다.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무엇인가 새롭게 자기 길을 개척해 가는 상황을 듣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더불어 많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보냈던 다른 젊은 분들의 근황을 듣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었다. 얼마 후 그녀는 센스 있게 커피 모바일 쿠폰을 보내왔다. 나는 이 음료를 마시면서 그녀와 그 음식에 대한 좋은 기억을 다시 호출할 듯하다.

이렇게 음식은, 좋은 기억은 또 다른 인연을 이어가게 만드는 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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