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경제불침항모의 탄생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의 대한민국은 국가안보의 큰 위기에 놓여 있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베트남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기위해 남한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으며,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공개적으로 발표하여 위기감을 고조시킨 것이다.
68년 군사분계선 돌파를 기도한 무장게릴라는 1,087명이었고, 후방에 침투한 게릴라는 175명이었다. 비무장지대에서의 교전 횟수는 67년 122회에서 68년 236회로 급증하였고, 68년 북한군 사망자 수는 321명이었으며 한국군과 미군 사망자 수는 162명이나 되었다.
68년 1월 21일에는 북한 제 124특수게릴라군단의 김신조일당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였으며, 이틀 뒤인 1월 23에는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여 승무원 80여명을 억류하였고, 69년 4월에는 미 공군 EC 121정찰기를 격추하여 북한은 한반도에 ‘월남전의 제2전선’을 완벽하게 형성했다.
70년 6월 22일에는 6.25기념식에 참석하는 박정희대통령을 노리고 북한 무장특공대 3명이 서울 국립묘지 현충문을 실수로 폭발시키는 사건도 일어났으며, 8월에는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에그뉴 부통령이 5년 안에 주한미군을 완전 철수한다는 폭탄발언을 하였고, 실제로 71년 3월 27일 미 7사단이 한국에서 철수했다.
국방안보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박대통령은 당시에 북한은 탱크, 잠수함까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능력을 자랑하는 반면, 한국은 소총도 생산하지 못하는 초라한 실정을 벗어나기위해 고뇌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박대통령은 250만 예비군의 기초 화기부터 자체적으로 생산하기위해, 71년 11월 상공부 광공전(鑛工電) 차관보인 오원철을 불러 병기개발을 지시한다.
정밀가공과 소재, 설계도에 대한 대책의 문답 끝에 박정희는 “당장 병기개발을 할 수 있다는 거지?”라고 물었고, 오원철은 “그렇습니다. 소총 및 기관총 등 개인화기와 박격포까지는 6개월 정도면 대충 개발을 끝낼 수가 있습니다… 각하! 김일성도 이런 식으로 병기개발을 시작해서 현재는 각종 화포는 물론 탱크나 잠수함까지 생산해 내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김일성 이야기가 나오자 박정희는 순간 눈에서 빛을 번쩍이며 오원철을 노려보듯 쏘아보았다. 그리고 박정희와 오원철의 질문과 대답은 두시간이나 더 진행되었다.[1]
오원철은 70년대 중화학공업의 청사진을 제시하여, 73년 1월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이끈 대표적인 테크노그라트(기술관료)였다. 경성공업전문학교, 서울대 공과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하였고 시발자동차회사 공장장, 상공부를 거쳐 71년 11월부터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개발을 이끌었다.
5개월 뒤인 72년 4월 3일 국산병기에 대한 시제품 시사회가 열렸고, 카빈총과 수류탄, 유탄발사기, 3.5인치 및 66mm 대천차 로켓포, 대인지뢰 등에 대한 화력시범이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이것은 자주국방의 첫걸음이었다. 고성능 국방화기개발에 대한 지난한 도전의 길이 아직 험난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잡다
70년도 까지 한국은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철도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경공업위주의 후진국이었다. 제철공장계획은 경제성과 기술력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히 국제투자단체에게 퇴짜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비관적인 조건에서도 대한민국 경제기적의 씨앗은 싹트고 있었으니, 이승만정권부터 시작된 유럽과 미국으로의 수백명이 넘는 유학생파견으로 산업화시대를 위한 미래를 천천히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64년 12월 같은 분단국가로서의 선의에 기대어 차관을 얻기 위한 박대통령의 서독방문이 있었고, 12월 1일 유학생 만남의 자리에서 뮌헨대학에서 철강금속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재관는 박정희에게 ‘한국의 철강공업 육성방안’을 전달한다. 박정희는 감격하여, “정말 고맙습니다. 내 돌아가서 꼭 제대로 된 철강회사를 만들겠습니다. 꼭 읽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이날의 결실은 67년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박정희는 18명의 해외유치과학자 중의 한명으로 김재관을 초빙했고, 김재관은 자신이 받던 연봉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보수에도 귀국, 합류하여 마침내 68년 5월 ‘포항종합제철 최초 설계도’를 작성하였다.[2]
최신기술에 대한 지식과 설계도가 있어도, 가장 큰 문제는 막대한 건설자금과 운용능력이었다. 박정희에게 포항제철건설의 중책을 맡은 박태준은 69년 1월 31일 미국 피츠버그로 국제차관단(KISA)의 프레드 포이 대표를 찾아갔지만, 혈맹의 우방이라지만 ‘IBRD(국제부흥개발은행)보고서의 경제성 없음’이라는 차가운 거절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이익만이 최고의 가치였던 것이다.
절망한 박태준은 귀국길의 하와이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바로 대일 청구권 중에 농수산용도로 남았있던 1억달러를 전용(轉用)하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일본이 자신들의 산업경쟁력을 위협할 수 있는 한국의 제철사업에 과연 협조할 것인가 였는데,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에 박태준은 청소년기를 일본에서 보내 일본어에 능통했고 일본문화를 잘알고 있어서 최적의 인물이었다.
박태준을 만난 일본 정재계의 거물들은 조국근대화에 대한 박태준의 애국심과 중후하고 빼어난 인품에 매료되어 어려운 문제들을 앞장서서 해결해 주었다. 양명학의 대가이며 정재계 거물이었던 야스오카 마사아쓰, 일본철강연맹의 이나야마 회장 등이 그들이다.
마지막 고비로 통산상 오히라 마사요시를 면담한 박태준은 한국의 경제상황으로는 농업자립화가 우선이 되어야한다면서 반대의 입장을 밝히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다가, 세번째 만남에서 급하게 일본 정부간행물보관소를 뒤진 정보를 쏟아냈다.
‘덕분에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청일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영국으로부터 군함을 차관으로 도입해왔습니다. 제철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제철소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명치 30년에 7만톤짜리 야하타제철소를 세웠습니다. 그 뒤에 러일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에게 제철소의 필요성은 다시 절실해졌고, 제철소 건설을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은 단순히 산업적 목적의식에서만 제철소를 세웠던 것이 아니라, 안보적 차원을 더 깊이 고려했습니다. 그때 제철소 건설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일본의 1인당 GNP는 오늘의 화페가치로 100달러 미만이었고, 한국의 현재 1인당 GNP는 200달러에 육박하고 있습니다.”[3]
대응을 궁색하게하는 역사적 사실과 북한의 안보위협까지 거론하자, 오히라의 작은 눈이 세번의 만남에서 드디어 실눈을 들어냈고 제철건설자금의 숨통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일본제철협상단과의 협상에서는 서독의 최신 기술을 견학한 김재관박사의 활약이 눈부셨다. 한국을 견제하기위해 그들은 세탁기, 밥솥 등을 만드는 소규모 공장을 제안했으나, 김재관은 제선, 압연, 제강을 연속주조하는 지상 100미터에 이르는 고로방식의 최첨단 일관제철소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선박, 자동차생산이 가능한 후판과 강판을 만들 수 있는 포항종합제철의 건설을 완성하게 되었다.[4]
[1]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2006, 103~118쪽
[2]홍하상,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 2022, 72~77쪽
[3]이대환, <박정희와 박태준>, 2015, 270~276쪽
[4]홍하상, 위의 책, 120~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