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70년대의 안보위기 속에서 박대통령은 방위산업을 고도화하려고 하였으나,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면서도 국내수요가 부족하여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 없는 문제로 낙담에 빠져 있었다. 71년 11월 박정희는 비서실장 김정렴에게 어려움을 토로했고, 김정렴은 이 문제를 상의하기위해 상공부 오원철 광공전 차관보를 만났다.
우리 둘은 진지한 토론 끝에 첫째 ‘여하한 병기도 분해하면 부품이다.’ 각 화기에 소요되는 적격소재를 설계대로 정밀가공하여 결합시키면 부품공장이 아무리 많아도 최종적으로 결합된 병기의 성능은 완벽한 것이 이치다. 둘째 무기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군공창(軍工廠)이나 민영군수공장은 병기수요가 불충분할 때 비경제적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 우리가 필요로 하는 현대무기는 선진국 수준의 중화학공업과 기술 및 기능이 절대적인 전제가 된다. 넷째 우리 나라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 건설의 일환으로 추진하되 부품별 또는 뭉치별로 유관공장에 분담시켜 무기수요의 변동에 따른 비경제성을 극소화시킨다. 다섯째 무기제조시설은 물론 기본이나 이에 못지 않게 기술자.기능공의 양성.확보도 긴요하다는 등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김정렴, <아, 박정희>, 271쪽
두 명은 즉시 대통령 집무실을 방문하여, 박대통령의 2대 국정과제였던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에 완전히 부합하는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병행개발이라는 절묘한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박대통령의 승낙을 받아냈다. 박대통령은 11월 10일 오원철을 경제 제 2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정부는 철강.비철금속.조선.전자.화학.기계 등의 7대 중화학공업을 선정했다.
박정희는 72년 ‘10월 유신’을 단행했고, 곧 이어 73년 1월 12일 당시에는 꿈만 같던 80년 초 수출 100억 달러라는 목표를 제시하며 일본의 경우를 참고하면 최소 10년이 소요되는 이른바 ‘중화학공업 선언’을 하게 된다.
“우리 나라 공업은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내가 제창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과학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국력이 급속히 신장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 없이는 우리는 절대 선진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80년대에 가서 우리가 100억 달러 수출, ‘중화학공업의 육성’ 등등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범국민적인 ‘과학기술의 개발’에 총력을 집중해야 되겠습니다. 국민학교 아동에서부터 대학생, 사회 성인까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기술을 배우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국력이 빨리 신장하는 것입니다. 80년대 초에 우리가 100억달러의 수출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체 수출상품 중에서 중화학제품이 50%를 훨씬 넘게 차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지금부터 철강, 조선, 기계, 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서, 이 분야의 제품수출을 강화하려고 추진하고 있습니다.”[1]
(2019년 1월에서 9월의 수출통계를 보면 IT제품(반도체, 디스플레이, 무선통신기기)의 비중이 22.3%, 중화학공업이 56%를 차지했다. 반도체의 경우에도 정밀기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니 중화학공업 고도화의 산물이다.)
산업화영웅들의 시대
80년대가 민주화영웅들의 시대였다면, 70년대는 산업화영웅들의 시대였다. 조국근대화라는 민족의 염원 아래 헌신적으로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기술관료 즉, 테크노크라트인 오원철, 김재관 등과 경제전문가들인 이코노크라트 남덕우, 김정렴, 김재익 등이 있고, 미국 연수를 통해 최신 경영, 관리기법을 익힌 군장교들인 박정희, 박태준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맡아 미국 육군부관학교에서 배운 최신 관리기법, 관리회계제도 개선, 인사제도 개선 등을 군장교출신 황경노, 노중열, 안병화 등에게 맡겨 ‘구식 부기’와 주먹구구 관리를 퇴출시켰다.
박정희는 5대 회의 즉, 월간경제동향보고. 수출진흥확대회의. 청와대국무회의. 국가기본운영계획심사분석회의. 방위산업진흥확대회를 최소 10년 이상 주재하며 스스로 경제와 기술에 능통한 테크노그라트가 되어 경제전략을 총지휘했다.
오원철의 경제 제2비서실에서는 김광모, 이석표, 권광원, 최태창, 김병원 등이 활약했고, 무기개발에 있어서는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심문택박사, 부소장 이경서, 구상회, 홍판기, 김철호, 김직현 등의 노고와 공이 컸다.
일본이 57년부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여 당시 43%의 비중을 10년 뒤에는 78%로 급상승시켜 경제대국이 된 것을 참조하여[2], 한국도 후진국을 벗어나는 길은 중화학공업 육성 밖에 없는 상황에서, 70년대 황무지를 개척했던 대한민국 산업화영웅들의 피땀어린 노력과 헌신은 사뭇 눈가를 촉촉하게 한다.
90년대 IMF사태와 2천년대 세계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팬데믹까지 숱한 경제위기가 닥쳤지만, 한국은 제조업이 약한 후진국들과 달리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세계적인 선진공업국가, 문화강국이 되었다. 70년대 중화학공업의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비판이 되고 있는 70년대 말 과잉투자와 중복투자의 문제가 발생하자 박정권은 안정화정책을 79년에 실시하였는데, 박대통령의 사망으로 그 숙제는 신군부에게 넘어가게 된다.
세상 모든 일이 좋은 것만 있을 수는 없어서, 경제고도화를 위한 자유와 인권의 억압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