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임시정부의 외부에 있던 그는, 외교부장으로 있던 조소앙에 의해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었고, 44년 5월 내무부장에 임명되면서 비로소 중심위치에 서게 되었다. 당시의 임시정부는 좌파가 함께한 ‘좌우연합정부’였는데, 민족진영이 주도하는 조직에 좌파가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민족혁명당 위원장인 김규식이 부주석, 김원봉이 군무부장,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의 유동열이 참모총장에 선임되었다.
민주주의의 정경대도(正逕大道)
광복 이후 임시정부 2진으로 환국한 신익희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신국가에서 이어가기위해 소위 ‘쿠테타’라고 불리우는 정치활동까지 감행하며 맹렬한 활동을 하였다.
45년 12월 28일 신탁통치가 공식 발표되자, 임시정부는 즉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결의문과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국자(國字) 1호와 2호를 발표하였다.
<국자 제1호>
1.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및 한인 직원을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2. 탁치반대의 시위운동을 계통적 행할 것
3. 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함
4. 국민의 최저 생활에 필요한 식량, 연료, 수도, 전기, 교통, 금융, 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지함
<국자 제2호>
이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 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이러한 선언과 실력행사[1]에 미군정은 이런 행동을 ‘쿠테타’로 규정하고, 김구를 불러 강력 항의하였으며 신익희는 CIC본부에 연행되어 이틀 동안 심문을 받았다.
한편, 신익희는 임시정부의 조직기반을 강화하기위해,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였는데, 미군정 CIC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정치공작대 본부원은 203명, 정치위원은 155명 등이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진행된 정치공작대의 활동은 테러활동으로 유명한 ‘백의사’와의 협력으로, 대북 반공테러가 진행되었다. 평양의 3.1절 기념행사에서 김일성을 암살하기위해 폭탄을 투척하였고, 3월 3일과 5일에는 최용건의 집을 습격하였으며, 김책.강양욱의 집도 각각 습격하였다. 테러 가담자 중 최기성, 김정의는 체포되었고, 이희두는 사살되었으며, 이성열은 월남하였다.[2]
이러한 테러활동의 여파로 48년에 김구가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평양 곳곳에는 ‘김구.이승만 타도하자’는 구호가 붙어 있었고 김구 타도하자는 구호가 울려퍼져 김구일행은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3]
김구 중심의 역사서술과는 달리, 47년부터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대세를 형성하며 세력이 계속 확대된 반면 김구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김구와 달리 한독당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장지필 등 중앙위원 80여명은 ‘우리 민족 총의인 자주독립을 쟁취키 위해서는 기동성 있는 총명 과감한 발전적 투쟁이 필요하다’면서 공동위원회에서의 합의와 지지는 결정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신익희도 북한이 소련에 예속된 괴뢰국가라는 인식과 입법의원으로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한 결과로 협상이 불가능함을 알게되어 이승만노선에 점차 가담하게되고 결국 7월 20일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입법의원 20명과 함께 민족대표자회의에 합류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원로였던 이시영도 9월 1일 국민회의의 남한단정 반대결의의 부당성을 이유로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의정원 대의원을 사퇴하였다.[4]
48년 5.10선거를 앞두고 한독당 지방 지부장들은 ‘대의기관을 통해 당의.당강을 실현’할 목적으로 ‘선거운동에 참여하자’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제기되었고, <동아일보> 48년 4월 21일자에는 ‘한국독립당과 중간파들이 무소속으로 대거 출마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실제로 제헌국회의원 198명 중 무려 85명이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즉,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세력은 5.10선거를 전후로 하여, 중간파 연합의 민족자주연맹과 한독당계열, 안재홍의 신한국민당계열, 조소앙의 사회당계열, 진보파 조봉암계열, 김규식과 신익희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5]
5.10선거에서 고향 경기도 광주에서 당선된 신익희는 초대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 의장이 공석이 되자 압도적 지지로 후임 국회의장에 선출되었고, 50년 2대 국회의장에도 후덕한 인품과 포용력으로 무난히 당선되어 총6년간 국회의장직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대한민국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 건국되었으나, 북의 적색제국주의세력은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 대규모 게릴라 남파 등으로 남한정권을 무너뜨리려 시도하였고 마침내 50년 6.25전쟁을 도발하고야 말았다.
전쟁 발발 직전에 도착한 한국 최초의 전함 백두산함의 활약과 대만(중화민국)의 안보리 참여에 대한 문제로 UN안보리에 불참한 소련이 아니었다면, 패망 직전에 갔음에도 이승만은 신익희의 사과성명 요구는 거부하고, 오히려 52년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갓 태어난 한국민주주의를 파괴하였다. 또한, 54년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지자 한국 정치는 독재의 길에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신익희와 조병옥, 장택상, 소선규 등 야당의원 60여명은 54년 11월 30일 ‘호헌동지회’를 결성하였고, 55년 9월 19일 마침내 신익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부산정치파동 13일 후인 52년 7월 17일 신익희 국회의장의 제4회 제헌기념일 기념사로, 그의 민주주의정신과 이승만정권에 대한 선전포고적 경고가 담겨있다.
첫째는 이 헌법 공포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오랜 봉건적 왕조와 외래제국주의로 고난의 몇 세대를 지나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주권재민이라는 민주헌법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날부터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전 국민에게서 나오고 일체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그 내용의 중대성입니다. 우리는 이 민주헌법에 의하여 국민각개의 개성의 존엄이 보장되었으며 의사표시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위시한 모든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국민 대 국가의 권리.의무가 규정되었습니다.
셋째는 이 헌법수호의 중요성입니다. 민주주의는 개성을 존중하고 자유를 보장하느니 만큼 이에 따르는 탈선의 폐단도 없지 아니하니 이것을 방지하고 건전하게 민주주의를 발전시킴에는 법률로서 이 자유의 한계를 정하고 이 법률을 준수하는 것이 절대로 요청되는 바입니다. 한편으로 민주주의의 자유를 인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준법이 엄격히 실행됨으로써 이것이 표리가 되어야만 민주주의는 정상적 발전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준법의 엄격성의 한 예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행정수반의 대통령도 취임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선서하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날을 당하여 우리가 가지게 된 이 헌법의 수호를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매진하여야 하며 이것을 무시하거나 위반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국민의 심판으로 엄숙히 광정(匡正)하여야 할 것입니다.[6]
그러나 참으로 야속한 ‘역사의 신’은 56년 5월 5일 신익희를 호남행 유세열차에서 뇌일혈로 사망하게 한다. 그 당시 동시에 유행한 ‘비 내리는 호남선’은 비탄에 잠긴 대한민국에 울려퍼졌고, 이승만은 명예로운 퇴진을 위한 마지막 기차를 놓치게 되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 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드란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 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드란다’
[1]신익희는 서울 시내 경찰서장 9명을 소집하여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를 것을 지시하였고, 경찰서장들은 이에 적극 동참하였다. 또한, 미군정청 3천여명의 한국인 직원들이 총사직을 결의하고 시위 행진을 하였다.
[2]이강수, 위의 책, 138~140쪽
[3]선우진,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2009, 146~151쪽
[4]이강수, 위의 책, 158쪽
[5]이강수, 위의 책, 166쪽
[6]이현희외 2명, <해공 신익희 연구>, 352~3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