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신화, 제1장 첫번째 민주주의자 신익희

대한민국 정통사관 2부

by 현진석

제 2 부 건 국 신 화



어머니도 말씀하셨소, 은빛 발을 가진 여신 테티스께서, 나를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망의 전령이 죽음의 끝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만일 이곳에서 남아 머물면서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둘러싸고 싸우면

귀향의 길은 내게서 영영 사라지겠지만,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라고.

그러나 내가 집으로,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고귀한 명성은 내게 사라지겠지만, 내게 수명은 오랫동안 길고 길게

지속될 것이며, 죽음의 끝은 나를 일찍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일리아스 제9권 408~416행, 김헌 옮김>



제1장 첫번재 민주주의자 신익희


公 在 此 國 重 (공재차국중)

公 去 大 韓 空 (공거대한공)

공께서 계실 때에는 이 나라가 무겁더니,

공께서 아니 계심에 대한민국이 텅 비었습니다.


잃어버린 민족지도자.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3.1운동부터 임시정부 참여, 좌우를 넘나드는 무력투쟁, 테러까지 불사한 반공투쟁, 6년간의 국회의장 활약, 이승만의 무도한 독재에 결연히 일어난 민주주의투사!

그가 3대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을 모으는 최초의 야당 바람을 일으키던 1956년 5월 5일, 호남행 열차에서 뇌일혈로 사망하고만 것이다.

이승만은 신익희국회의장의 6.25전쟁 책임에 대한 대국민 사과성명을 거부했으며[1],

52년 부산정치파동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했고, 마침내 54년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하여 야당과 국민의 강력한 반독재투쟁을 불러왔다.

대세가 기울어지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공무원들이 해공 신익희에게 줄을 대는 등 불안해하자,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는 담화를 발표하여 불안을 가라앉혔는데, 그 내용에서 대통령 이승만의 공과 과가 여실히 드러난다.

‘공무원들이 신분을 불안해하는 모양인데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책임자들 안심용으로 내 친필을 발송하라… 우남(이승만)은 연령으로나 독립운동 경력으로나 겨레의 영웅인데 저리되시다니 침통하고 애달프다. 나이로 찍어 누르는 우남의 노욕에 바른 말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한 탓이다. 결국 우남은 민족의 정기를 세우는데 실패했고 그것은 내치의 과오로 이어졌다. 하지만 미국.일본을 다루는 솜씨와 인구 2천5백만명 나라에 40만 대군을 거느리는 통솔력과 타고난 청렴성은 인정해야 한다. 여전히 우남은 나라의 구심점이다. 내가 대통령이 돼도 그 분을 나라의 어른으로 모실 참이다.’[2]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해공이 사망하자, 국민들은 비통에 잠겼고 추모표가 185만표나 나왔다. 서울에서는 전체 투표자 60만여명 중 이승만이 20만여 표, 신익희 추모표가 무려 28만 4,359표[3]가 나와 정권교체의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승만에게도 건국의 영웅으로 존경받을 마지막 기회가 사라지게된 것이고,

대한민국은 미진했던 친일청산과 부정부패 척결을 해결할 절호의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해공(海公)은 친일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도 적극적 반민족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대범하게 포용하려는 자세를 여러 차례 보였지만, 국회의장과 대통령후보로서는 반민특위 적극 지지와 친일청산의 강한 의지를 천명했다.

‘독립정신이 쇠약하다. 전화(戰禍)에 부정부패까지 만연하니 신흥국으로서 순결미를 찾아보기 힘들다. 미흡한 역사청산이 문제다. 악질부류를 추상열일(秋霜烈日)의 태도로 다스려야 한다. 반국가. 반윤리. 반민족적으로 축재한 공무원 몇 명만 골라 수술하면 되는데 시기를 놓칠까 걱정이다. 너무 가혹하고 야만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도 있다. 두려워마라. 중국의 장개석도 공개처형으로 공무원의 탐욕을 다스렸다.’[4]


실사구시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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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는 1894년 경기도 광주군 서하리에서 소론계인 평산 신씨 신단의 6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고조부 신대우가 조선 양명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정제두의 계승자여서, 신익희는 자연스럽게 명분 보다는 실질적인 가치와 행동들 중시하는 전내실기(專內實己, 내면을 오로지 하고 자기를 참되게함)의 정신을 간직하게 되었다. 향후 독립운동에 있어서 좌우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행보는 이러한 가풍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서울에서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다니던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비탄에 잠겨 있다가 조국을 다시 되찾으려면 반드시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2년 4월 동경의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1916년 9월 제4대 학우회 회장이 되어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민족의식을 높이는 ‘조선학회’에서도 글을 발표하고 토론에 참여하였다. 방학 때에는 한국에 돌아와 소학교 역할의 광동강숙의 설립에 참여하여, 신학문 교육에 열정을 보였다. 여기에서는 <심상소학>, <유년필독>, <국민독본> 등을 가르쳤는데, 현채(玄采)의 유년필독은 일제가 1909년 금서로 지정한 언문교과서로 아동들에게 윤리교육과 민족주체의식을 함양시키고 국가의 흥망성쇠가 국민에게 달려있다는 국가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지어진 책이었다.[5]

이러한 민족교육을 중시한 신익희의 생각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46년 12월 국민대학을 설립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1918년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식민지조선에서는 독립운동이 활기를 띄게 되었고 신익희도 18년 11월 독립선언의 움직임을 알리기위해 중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19년 3.1운동 다음날인 3월 2일에 귀국하여 보성법률학교 제자인 강기덕과 한창황 등에게 연락하여 3월 5일 제 2차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6]

그와 이기원 등은 등사기를 빌려 독립선언서를 등사해서 각 가정에 배포하였는데, 일경에게 정보가 탐지되어 이기원은 체포되고 신익희의 집에도 일경이 들이닥치자 뒷담으로 도망친 그는 결국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기차를 통해 신의주, 봉천을 거쳐 19일 상해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 절친한 친구인 와세다대학 동기 윤홍섭[7]으로부터 순종비 윤황후에게 받은 10만원이라는 거액을 전달받아 임시정부 설립에 보태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신익희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민국임시헌장기초 심사위원, 내무차장으로 임명으로 내무총장 안창호가 상해에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여 맹활약하였다.

그런데 1922년이 되자 독립운동의 노선에 대한 의견충돌이 격화되어, 임시정부를 해소하고 새로운 지도조직을 만들자는 주장이 대두되어 신익희도 ‘국민대표회의’개최에 찬성하였다. 23년 1월부터 5월까지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지만, 갈등만 증가하고 별다른 성과없이 끝나자 신익희는 유명무실해진 임시정부를 떠나 항일무력투쟁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는 시안(西安)의 중국국민당 후징이를 찾아가 분용대(奮勇隊)를 조직하고 군사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임시정부 간판만을 붙들고 있었댔자 큰 발전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독립운동의 활로를 딴 방향으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선전이나 평화로운 방식으로는 더 이상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리 임시정부는 간판만이라도 유지해 나가야 하겠기에 늙고 비교적 활동력이 부족한 독립운동의 원로 동지들에게 맡기고 나는 당시 혁명의 상승기에 있는 중국혁명과 연계하여 한중합작으로 평소 주장이던 군사행동의 일부를 실현하여 보려 하였다.[8]


후징이는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한 군인이었고, 그가 일본에 있을 때 신익희와 교류가 있었다. 그는 신익희를 육군 중장으로 임명하였고, 분용대에서 중국인 300명과 한인 청년 200명 등을 모아 군사교육을 실시하게 하였다. 일종의 유격부대였던 분용대의 국내진격 작전을 위하여,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의열단 활동을 하던 성주식을 북만주로 초빙하여, 분용대 연성대장으로 임명 후 교육훈련 및 국내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분용대의 계획은 적극적 후원자였던 후징이가 25년 5월 급서하게되어 무산되었으며, 후일 중국군이 동북 삼성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성주식이 분용대 대장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9]

신익희의 무장투쟁은 좌파조직인 ‘조선청년전위동맹’에 38년 가담하여, 10월에는 김규식. 김원봉과 함께 좌파무장단체인 ‘조선의용대’를 편성하면서 계속되었다. 유치송의 증언에 의하면, 신익희는 의용대원 수십명과 함께 중국 각지를 다니며 선무공작을 지휘하였다고 한다.[10]

신익희의 이러한 좌우를 넘나드는 무장투쟁활동은 민족독립에 있어서 군사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41년 조선의용대 제 2지대가 화북의 중국공산당에 합류하고, 김원봉의 본대가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들어옴에 따라 신익희도 만 20년만에 충칭의 임시정부에 복귀하게 된다.


[1]한수자, <버림>, 2006년, 150쪽

[2]한수자, 위의 책, 62쪽

[3]이강수, <신익희>, 192쪽

[4]한수자, 위의 책, 132쪽

[5]이현희외 2명, <해공 신익희 연구>, 2011, 95쪽

[6]위의 책, 117쪽

[7]해풍부원군 윤택영의 큰아들로, 미국으로 유학하여 콜롬비아대학 석사와 아메리칸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발기인, 숙명학원 이사장, 대동청년단 상무이사 등의 활동을 하였다.

[8]이강수, 위의 책, ‘자서전’, 73쪽

[9]이현희외 2명,위의 책, 175쪽

[10]이강수, 위의 책,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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