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임시정부의 심장 김구
김구와 이승만은 식민지시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두 영웅이었다. 그런 그들에 대한 21세기의 평가는 피란만장한 두명의 인생만큼 극단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승만은 우파들에 의해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으로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의 노욕(老慾)에 의한 불명예 퇴진으로 대중들의 반응은 크지 않은 상황이며, 김구는 좌파 정치인들이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가 되어야 했다'라고 공공연히 발언할만큼 진정한 민족지도자로 대중들에게 자리잡고 있다.
반면, 뉴라이트와 신우익들은 김구를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인물이며,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일부 잘못된 행위들을 들추어 폄하를 시도하고 있다.
전쟁과 군사독재, 민주화운동의 시대를 지나오며 고난을 겪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아 대한민국의 갈등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현대사의 인물들에 대한 공정하고 정당한 공과 과의 평가는 후대 세대들에게 바른 역사관을 가지게 하는데 필수적이다.
김구와 이승만에 대한 신화도 일부 걷어내어, 지나친 찬양과 비난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
불멸의 독립혼
상민, 즉 멸시받는 평민으로 태어나 한국 최고의 민족지도자가 된 김구의 인생은, 청장년기의 다소 과격한 항일운동에서 중년 이후의 중후한 결단력으로 불굴의 독립정신을 과시한 한편의 성장드라마이다.
백범의 청년기는 반항아의 모습으로, 그의 선조들은 200여년 전 간신으로 유명한 김자점의 역모에 따른 멸문지화를 피해 황해도로 숨어 들어 신분을 숨기고 살았는데, <백범일지>에 그러한 내용을 밝히고 있다.
어린 시절 익힌 한학에 의한 출사는 부패한 과거제도에 의해 좌절되고, 낙담한
백범은 한때 관상을 공부하였는데 자신의 관상을 보니 귀격이나 부격은 없고 천격과 빈격만 있어 크게 낙담하였다.
그런 와중에 <마의상서(麻衣相書)> 한 구절이 그가 운명을 개척하여 분발하게 하는 동기를 만들어 주었다.
‘상호불여신호(相 好 不 如 身 好) 신호불여심호(身 好 不 如 心 好)’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이 글귀를 보고 김구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굳게 결심하였다. 사실 청년기 김구의 인상은 마마 자국과 거친 성정으로 다소 험악한 인상이었는데, 마음 공부와 대의(大義)를 따르는 자세를 유지하여 중년 이후에는 인자하면서도 위엄있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1]
백범은 18세에 동학에 입도하게되고, 이듬해인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애기접주로 불리우며 참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96년에는 유명한 치하포사건으로 투옥되게 된다.
국모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인 육군 중위를 칼로 찔러 주였다는 것인데, 일본인의 신분이 <백범일지>에만 군인으로 기록되어있고 심문조서, 기타 보고서, <독립신문>등에는 모두 일본 상인으로 되어 있어 이 부분은 백범의 의거를 과장,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2]
실제 그가 일본 장교였다면, 이후 김구가 탈옥과 국내활동을 하기에는 중범죄인의 죄가 너무 큰 것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1911년 1월 5일에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 즉,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600여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했는데, 김구도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3년 6개월만인 1915년 8월 가출옥 되었다
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황해도 안악에서 들은 김구는, 상해로 망명길에 올라 4월에는 임시정부 내무위원이 되었고, 9월에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도움으로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임시정부의 경호와 밀정 색출 등을 책임지는 경무국장의 역할에서부터 김구의 운명은 어느 정도 결정되었다고 하겠는데, 위풍당앙한 체격과 결단력을 가지고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와 한인애국단, 해방 이후의 청년단을 관리하면서 혈기 넘치는 청년들의 지지를 받아 임시정부의 상징이 되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장덕수암살에 그의 청년단이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정에 까지 서게되어 결국 정치적 고립으로 극우세력에게 암살되는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임정 보위와 경찰책임자를 맡다 보니, 불미스러운 폭행사건도 여러건 남게 되었다. 임정을 반대하던 박은식에게 ‘이를(국민대표회의) 강행한다면 이완용 이상의 국적이 될 것이다’는 격한 용어를 쓰고, 그의 아들 박시창을 구타하여 병원에 입원까지 하는 사건도 있었다.[3]
어쨌든, 백범 김구의 가장 큰 업적은 노쇠화한 임정을 의열활동을 통해 우뚝 세워 끝까지 지켜낸 것이다. 이동녕이 주석으로 있던 시기에 특무활동의 전권을 위임받아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성사시킨 업적은 한국인의 애국심을 세상에 널리 알린 빛나는 쾌거였다.
1931년 11월에 결성된 한인애국단은 비밀결사여서 정확한 인원과 이름은 알 수없지만, 신용하교수가 정리한 명단이 있다.
‘단장: 김구
단원: 안공근, 김동우, 김해산, 엄항섭, 김홍일, 안경근, 손창도, 김의한,
백구파, 김현구, 손두환, 주엽, 양동호, 이덕주, 유진식,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최흥식, 이수봉, 이성원, 이성발, 왕종호, 이국혁,
노태영, 김경호, 김철’[4]
35년 6월 남경에서 9개 독립운동단체의 대표회의가 열리고 7월5일 통합‘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신당의 김두봉과 김원봉 등은 ‘5당이 통일된 이 시점에 명패만 남은 임시정부를 존재케 할 필요가 없으니 해체해 버리자’는 강경한 주장을 했다.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김구는 항주에서 이시영, 조완구, 김붕준, 양소벽, 송병조, 차리석 등 의정원 의원들과 임시정부 문제를 협의한 결과, 3.1항쟁의 국민적 역량으로 결성된 임시정부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국무위원 김구 명의로 의정원 의원들에게 강력한 서한을 보냈다.
동양의 괴수 일황을 처단하고 그의 장수와 신하를 살육하는 것이 우리 신성한 정부의 역할이다. 한족의 피를 가지고 국권.국토를 광복하려는 한인은 거개 임정을 옹대할 의무가 있다.(중략) 그동안 자기 필요로 임정 직원이 되었다가도 개인적 불만이 있을 때는 헌신짝처럼 벗어던지고 반역을 기도함이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아니하였다.
지금 제공은 김구 역시 그런 의롭지 못하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는가.
김구는 비록 현직을 갖기는 능력이 없으나 국민된 책임만은 명심각골하고 모험분투해왔다.
이봉창.윤봉길 두 의사가 결코 자기 일신만의 충혼이 아니고 재래 순국의열의 하늘에 계신 영령이 총동원하여 한편으로 임정 직원에 묵시하고 한편으로 이.윤.권.최의 제의사 선봉을 삼아 동정북벌한 그 권위를 장仗하고, 김구는 일심으로 임무를 다하여 홀로 선열을 위로하고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 중이다.(중략)[5]
[1]김삼웅, <백범 김구 평전>, 69~70쪽
[2]김상구, <김구 청문회>, 2014, 57~69쪽
[3]김삼웅, 위의 책, 236쪽
[4]김삼웅, 위의 책, 위의 책, 263쪽
[5]김삼웅, 위의 책, 3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