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외유내강의 민족주의자 인촌 김성수
식민지조선에서 일제가 가장 싫어하는 민족교육, 민족언론, 민족기업에 헌신적으로 기여한 인촌 김성수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 2018년 2월 국무회의를 거쳐 취소되었다. 해방 직후인 1949년 반민특위에서는 전혀 거론조차 되지 않았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고결한 민족지도자로 추앙 받았던 인물에 대한 친일몰이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당대의 많은 대지주의 자제들이 향락에 빠져 있을 때,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만 다시 광명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양부와 생부에게 눈물과 단식으로 호소하여 사업을 일구고, 총독부 관리들에게 조롱과 협박을 수십년간 받은 성자(聖者)같은 분에게 말이다.
그에게 합당한 평가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정치적으로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초대내각 구성과 부산정치파동으로 심한 대립을 겪은 이승만대통령의 인촌에 대한 조사(弔辭)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몇 가지만 가지고 보아도 그 분이 애국적인 성심과 앞길을 보는 정견으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는 개인의 득실과 이해를 헤아리지 않고 지켜서 싸워 온 분임으로 우리나라 모든 지도계급 여러 사람 중의 특출한 인물이었으며 애국지사 중에 유일한 자리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김공이 나를 절대로 지지하자고 한 것도 사사친분이나 이해관계를 조금도 생각한 것이 없고 내 입장이 애국주의에서 나온 것을 깊이 깨달아 앞길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와 같이 행하여 온 것이므로 그의 애국심을 추앙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김공은 우리나라의 큰 교육자였으며 애국지사였음을 우리사람들은 영구히 기념할 것이며 또한 그는 지금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정치가라고 불리우기는 합당치 않는 사람이었으니 그도 이것을 싫어하여서 정당(政黨) 방면으로 나서기를 대단히 싫어했던 것이다.[1]
민족자본을 위해 헌신하다
인촌 본인이 가장 열정을 가지고 추진한 민족사업은 바로 교육이었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의 명문가요 대지주였던 김경중의 4남으로 태어나, ‘영신학교’를 세운 양부 김기중과 <조선사>17권을 저술한 생부 김경중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학문과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1911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해서는 도쿄의 놀랍도록 발전한 모습에 놀랐고, 근대화를 위해서는 와세다대학 설립자 오쿠마 시게노부와 게이오대학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교육정신을 본받아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조선의 우수한 교육이 우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후일의 도움을 위하여 와세다대학 창립 30주년 행사에 양부와 생부를 초청하여, 일본의 발전한 산업시설과 관청, 학교 등을 둘러보게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알렸다. 그 결과로 민족사학으로 설립된 중앙학교를 인촌이 인수할 때에, 양부에게 간청하여 3천 두락의 토지를 내놓게 설득하였고 생부에게는 단식까지하며 자금을 구했다. 감격한 인촌은 양부 앞에서 손을 짚고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총독부 학무국은 인촌에게 여러 수모를 주며 중앙학교 인수를 허가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와세다대학 나가이교수와 단나카교수가 서울에 온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허가를 받아냈다. 민족자본 육성자 인촌 김성수가 처음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한편, 중앙학교는 3.1운동에서도 물심 양면으로 빼놓을 수 없는 활약을 하였는데, 학교 숙직실에서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등이 회합하여 독립선언서를 기획하고 민족지도자들을 접촉하였던 것이다. 인촌은 기독교 원로요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을 기당 현상윤에게 가담시키도록 접촉케 하였으며, 활동자금 수천원을 내놓았다.[2]
인재를 중시한 그는 일본유학 시절을 비롯하여 교육비지원을 아끼지않아 1천명이 넘는 학생들을 후원하였고, 임시정부와 김좌진장군에게도 여러 차례 거액을 전달하였다. 계급문학가 팔봉 김기진은,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하는 사람 중에 그에게 돈을 받아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3]
민족언론인 <동아일보>의 창간에 있어서는, 인촌 특유의 신중한 자세가 특징으로 여러 차례의 권유에도 주저하다가 <황성신문>의 설립동인이자 증앙학교 전 교장인 유근의 ‘근대화 사업에 교육사업도 중요하지만 언론사업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강력한 설득으로 설립에 참여하게 되었다.
주간 장덕수는 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서 ‘주지를 선명하노라’를 통해 설립의 3대 취지를 밝혔다.
1).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
조선민중 전체인 2천만의 표현기관으로서 그들의 의사와 이상과 기도와 운동을 사실대로 표현하고 보도하기를 선언한다.
2). 민주주의를 지지함
여기서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국체나 정체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라 인류생활의 원리와 정신을 이야기한다. 강권이나 폭력을 배척하고 인격에 고유한 권리의무를 제창한다.
3). 문화주의의 제창
문화주의는 개인 및 사회의 생활내용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의 증진, 정치의 완성,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을 도모하고 과학과 철학 및 예술의 발달에 노력할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취지와 걸맞게 <동아일보>의 활동은 눈부신 것이었다. 민립대학 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한글철자통일안 제정 및 보급, 계몽 및 문맹퇴치 운동(브나로드 운동), 충무공 이순신 유적 보전운동 등등으로 조선민족의 구심점이 되는 ‘형태 없는 정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논조는 불가피하게 수백번의 압수와 4차례의 무기정간을 당하도록 하였고, 결국 40년 8월 10일 총독부에 의해 강제폐간되고 말았다.
[1]백완기, <인촌 김성수의 삶>, 2012, 240쪽
[2]백완기, 위의 책, 56~61쪽
[3]백완기, 위의 책, 164~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