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진석 Sep 21. 2022

대한민국 정통사관, 빛바랜 신화

건국신화 제4장(2편)

 이승만의 막강한 정치적 힘과 명성의 큰 동력은 그의 언론인, 저작가로서의 활발한 움직임이 바탕이 되었다. 해방공간에서 가망없는 논쟁만 지리하게 계속되는 중에서도 그의 언론플레이와 미행정부에 대한 접촉과 로비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46년 10월 23일 뉴욕에서 개막된 유엔총회에는 한국문제가 상정되기를 희망하며, 여자국민당 당수 임영신(任永信)을 파견하였는데 사업에 크게 성공한 그녀의 오빠 임일(任一, LA거주)에게 지원받은 외교활동 비용은 38만달러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11월 10일과 16일 사이에 유엔총회 미국대표단의 일원인 엘리노어 루스벨트여사, 벨기에대표단장이며 총회 의장인 스파크, 중국대표단장 웰링턴 구, 노르웨이 출신의 리(Trygve H. Lie) 유엔사무총장, 필리핀대표단장 로물로장군, 장개석총통, 뉴욕교구 스펠먼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중대한 상황이 급속히 진전되고 있습니다. 수천의 적색 테러리스트들이 북한으로부터 침투하여 우리를 굴복시키려고 전국 각지에서 비인간적인 잔학행위와 방화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유엔회의가 한국의 단독정부를 승인하도록 요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인을 받으면 우리는 유엔과 직접 협상하는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북한에서 오는 테러리스트들은 상황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중립적인 미국인들은 사태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승인된 독립정부를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화를 유지할 수 없고 남한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1]


 한편, 미 국무부가 완강히 이승만의 임시정부 승인 요구를 거부한 이유는 ‘신탁 통치의 창안자’로 알려진 랭던(William R.Langdon, 서울 주재 미국영사. 도쿄 미 대사관 근무 경력))이 42년 2월 22일 국무부에 제출한 ‘한국 독립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이라는 정책건의서의 영향이 컸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37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서 정치적으로 거세당하여 정치, 행정, 외교, 사법, 경찰, 재정, 금융, 교육, 통신, 해운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국가를 운영할 경험을 쌓지 못했고, 2). 그들은 일본이 한국인의 군 복무를 허용하지 않고 무기 소유를 엄격히 금지한 상태에서 보호만을 받고 살아왔기 때문에 자위(self-defense)에 필요한 전문 지식과 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며, 3). 그들은 금융, 대기업, 기계제조업, 공학, 수출입 업무, 운송업 등에서 배제되어 근대적인 경제 제도와 운영에 대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 경제가 일본에 통합.운영되어 왔기 때문에 일본과 분리될 경우 적지 않은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였으며, 4). 특정 한인 단체를 임시정부로 승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지만, 상황이 보다 확실해질 때까지는 피정복 민족들의 해방과 같은 일반적 원칙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그 이상의 어떤 언질도 주어서는 안된다고 건의했다.

 

 이러한 진단을 바탕으로 랭던은 한국은 일본이 패망한 후 ‘적어도 한 세대 동안 열강의 보호와 지도 및 원조를 받아야만 근대 국가의 지위로 나갈 수 있음이 명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2]

 식민지조선을 경험한 직업 외교관의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냉정한 평가였다. 이렇게 망국과 식민지시대의 고난은 한국인들에게 해방 후의 대혼란과 전쟁의 참화라는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빛바랜 신화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이유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무시하는 정치적 행위는 어느 정도 한계까지 허용이 가능한 것일까.  

 이승만의 경우에는 제1차 부산정치파동에서는 전쟁 중의 위기상황이었고, 미국과의 외교에 있어서 최고의 전문가라는 그의 판단은 상당 부분 옳은 것이었다. 그 결과도 능수능란한 미국과의 협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국가안보를 확보하고, 향후 산업화를 위한 국방비절감이라는 그의 최대 업적을 이루어 냈다. 

 제2차 사사오입 개헌에서는 국익을 위한다는 그의 주장이 사익의 추구라는 도덕성의 추락으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고, 그 결과도 56년 선거에서 야당 후보 신익희의 사후 추모표 185만표와 장면의 부통령 당선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당시로는 엄청난 고령인 80대 노(老)정치인의 생물학적 능력이 현저히 감소하여, 국정 통제력을 잃고 프란체스카여사.비서관들.강경파 자유당의원들의 국정 농단을 단속하고 장악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많은 업적들인 의무교육 도입, 수백명의 해외 유학생 파견, 미국의 정책에 대항하여 수입대체산업 육성, 원자력연구소 설치 등도 부정부패의 대명사가 된 ‘자유당시대’라는 오명에 제대로 주목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노욕(老慾)이 분명했다. 1875년생으로 30년을 전제군주의 시대에 살았던 그는 봉건시대와 근대의 중간자로서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시민의 자질이 부족했다. 국민들이 완벽하지 않은데, 정치지도자만 완벽할 수 있겠는가.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서 왕손이라는 의식도 가지고 있었던 우남 이승만은 이기붕일가족의 자살, 4.19 사망자 186명과 부상자 1,500여명이라는 참극 끝에 불명예 하야라는 한국현대사의 아픈 기억중의 하나가 되어, 그 찬란한 신화도 함께 막을 내렸다. 


          

[1]손세일, 위의 책, 728~729쪽 

[2]유영익, 위의 책, 171쪽 



이전 24화 건국신화, 제4장 자유의 투사 이승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