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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석 Sep 28. 2022

건국신화, 제6장 민족중흥의 혁명가 박정희

대한민국 정통사관 제2부 

        제6장  민족중흥의 혁명가 박정희 

  

 20세기는 제국주의와 혁명의 시대였다. 유럽의 열강들과 아시아의 일본제국은 식민지 확보에 국운을 건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한 국제정세에서 제국본토나 식민지 민중 모두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좌파와 우파의 혁명 또는 쿠데타가 수 없이 발생했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의 모티브가 된 러시아 젊은 귀족장교들의 반란, 즉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의 난은 그 신선함과 시베리아 유형지까지 따라간 귀족부인들의 낭만성으로 유명하지만 미숙함과 민중과의 교감 부족으로 실패했고, 청년 박정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1936년 가난한 농촌 출신 일본 청년장교들의 2.26사건은 고위 관료 여러명을 살해하는 과격함으로 일본 천황의 분노를 사서 결국 실패했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된 5.16혁명은 소수의 부상자만 발생한(한강 다리 교전) 우파 쿠데타로서, 한 국가의 수준을 몇 단계 상승시킨 매우 성공적인 사례다. 한국인들의 악습 중 하나인, 남의 성취를 깍아내리는 문화로 보더라도, 카오스적인 혼란과 절대 빈곤에서 중견 공업국으로 끌어올린 업적은 ‘훌륭한 국민’은 있었는데 ‘훌륭한 지도자’는 없었다는 허무한 비평이 공정하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10월 유신 이후 지나친 권력욕으로 각종 조작사건과 고문, 인권 유린, 월남파병 납치군인들 외면 등의 ‘군사독재’의 군사라는 폭압적 단어가 자연스럽게 풍기는 지독한 폭력의 냄새는 아직도 우리에게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치유에 정성을 다하게 만든다. 


                       나폴레옹을 꿈꾼 소년 


 대통령시절까지 포함하여 박정희는 위인들의 전기물을 많이 읽었다. 학창시절에는 <이순신전>, <나폴레옹 위인전>, <삼국지>등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특히, 나폴레옹은 같은 식민지에서 태어난 환경적 동질성과 최고 권력에 오르는 과정이 그를 매료시켰다. ‘쿠데타’라는 용어가 나폴레옹에게서 기원하듯, 일본군대의 사열과 훈련을 보고 군인에 대한 동경을 키워나간 박정희에게 ‘쿠데타’는 그의 운명으로 장차 현실이 된다. 

 이광수의 <이순신전>과 일제 교과서의 조선정치의 당파성에 대한 비난은, 박정희에게 4.19 이후의 극심한 정쟁과 집권 이후 야당의 비난공세에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주는 시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무능한 왕과 시기심 많은 선비 정치인들의 모함으로 큰 고초를 겪었으니, 박정희도 망국의 소년으로 울분을 터트렸을 것이다. 


 민주주의에 관한 박정희의 언급들을 보면, 그것들은 언제나 절차가 아니라 실체적인 개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란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며, 그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조화롭게 달성하려는 민주주의의 이념”처럼 민주주의의 목표를 주로 논의한다. 즉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란 “목표가 아니라 절차 또는 규칙”이라거나, “민주주의란 침범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운영 원리”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만약 민주주의가 개인과 민족의 행복의 증진에 단기적으로 기여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를 “생활환경과 개성에 따라” 상당 기간 유보할 수도 있는, 선택 가능한 방법(제도) 중의 하나로 이해했을 뿐이다. 

                                                         전인권, <박정희 평전>, 331쪽 


 북한 김일성의 최대 라이벌인 박정희는 그의 남침전쟁으로 다시 부활했다. 남로당사건으로 군 장교가 아닌 군무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전쟁으로 정보장교로 복귀했으며 60만 대군으로 성장한 막강한 군 조직과 상하의 인맥을 이용하여 군사혁명에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승만정권의 말기부터 서구의 민주주의가 한국에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여기고, 다른 후진국들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59년 11월 1일 미국 상원 외교분과위원회에 제출된 대한(對韓) 정책에 대한 ‘콜론보고서’는 로버트 스칼라피노 등의 한국 전문가들이 한국을 직접 방문하여 작성한 것이었는데, 이 보고서는 60년 1월부터 5월까지 <사상계>에 게재되어 젊은 장교들을 자극하여 정치적으로 변모하게 만들었다. 


 한국에는 민주주의의 껍질만 남은 것도 기적이다.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부적당한 것 같다. 차라리 인자한 전제정치가 타당할는지 모른다… 젊은, 교육을 받은 계급이 그들의 재능과 힘을 충분히 발휘할 곳을 찾지 못하여 지식 프롤레타리아로 발전해갈 상당한 위험성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또 양심이란 것을 지키는 사람은 전부 소외되거나 배척되고,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만이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불원 한국 사회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가난한 국가의 유능한 자제가 일반 대학에 들어가는 수는 학자금 부족으로 인해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그들에게 어떠한 고등교육의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보통 군부 학교를 통해서이다. 이리하여 하층 계급 출신의 유망한 청년 장교가 다수 생기며, 특권적 관리 정치가에 분노를 갖게 된다. 이것은 폭발할 우려도 있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한국이 타국의 예를 따라 군사 지배가 정당을 대체하는 그런 사태가 있을 수 있다 하는 의문은 정당한 것이다. 이것은 있을 법한 일이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가능성은 적다.[1]


          

[1]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1960년대편 1권,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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