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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석 Sep 26. 2022

건국신화, 제5장 청년노동자의 인간선언 전태일

대한민국 정통사관 제2부 

            제5장 청년노동자의 인간선언 전태일 


 70년 11월 13일 무명의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6.25 전쟁 이후의 반공사상은 노동운동 자체를 금기시하게 만들었고, 지식인과 대학생들도 정치운동에만 치중하여 산업화의 과정에서 인권이 파괴되고 억압받던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언론과 사회에 들리지 않는 시대였다.

 47년생으로 전태일 보다 한살 많은 조영래도 큰 충격을 받은 사람 중의 한명이었다. 대구라는 같은 고향의 젊은 재단사가 목숨을 던져가며 전하려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이러한 의문은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간 수배생활을 하면서, 어머니 이소선을 만나고 전태일이 남긴 글들을 연구하며 한권의 책으로 그 답을 얻게 된다. 

 전태일의 일대기는 군사독재시대에서는 출간이 불가하여, 78년 일본판이 먼저 출간되었고 한국어판은 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전태일평전>이라는 이름으로는 91년에 초판이 출간되었다. 

 절친인 장기표의 말에 의하면, 조영래는 전태일의 분신 이후 많은 이들의 죽음이 잇따르자 많은 번민을 하였고 평전의 저자가 자신임이 알려지기를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어린 소녀노동자의 죽음  

 

 70년대 청계천 피복업체들은 매우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악명이 높았다. 어린 시다들에게 미싱사 언니는 이렇게 푸념했다. “… 평화시장의 여공생활 8년 만에 남은 것은 병과 노처녀 신세뿐이더라. 너만한 나이 때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일찌감치 평화시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야.”[1]

 사실이었다. 8평 정도의 방에 2층으로 칸을 나누어 환기시설이 전무한 환경에서 하루 14시간 이상 격무에 시달리는 이들은 거의 전부가 기관지염, 안질, 빈혈, 신경통, 위장병 등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근로기준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영세사업장의 특성상 시청과 노동청 근로감독관과 업주들은 서로간에 부정부패와 억압적인 노동정책으로 엮여있어 감독의 기능은 실종되어 있었으므로, 전태일은 법이 법이 아닌 무법천지에 절망하여 자기 한몸을 던져가게 되는 것이다. 

 4백여개 업체, 미싱사 4천명, 시다(12세에서 21세) 4천명, 재단사 3백명, 재단보조 4백6십명 등이 근무하는 평화시장 피복제품상의 열악한 근무환경은 전태일의 노력으로 70년 10월 7일 <경향신문>석간에 실려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평화시장 내의 피복가공 공장은 4백여 개나 되는데, 이들 대부분의 작업장은 건평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로 작업장은 비좁다. 더구나 작업장은 1층을 아래위 둘로 나눠 천장의 높이가 겨우 1.6m 정도밖에 안돼 허리를 필 수 없을 정도인데, 이와 같이 좁고 낮은 방에 작업을 위해 너무 밝은 조명을 해 이들 대부분은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다고 노동청에 진정까지 해왔다. 

 이들에 의하면 이런 환경 속에 하루 13시간~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있으며 첫째, 셋째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휴일에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생리휴가 등 특별휴가는 생각조차 못할 형편이라는 것이다. 

 특히 13세 정도의 어린 소녀들이 대부분인 조수의 경우 이미 4~5년 전부터 받는 3천원의 월급을 그대로 받고 있다. 이밖에도 이들은 옷감에서 나는 먼지가 가득 찬 방안에서 하루 종일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있어 성장기에 있는 소녀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근로조건이 나쁜 곳에서 일하는데도 감독관청인 노동청에서 매년 실시하는 건강진단은 대부분이 한 번도 받은 일이 없으며, 지난 69년 가을 건강진단이 나왔으나 공장 측은 1개 공장 종업원 2~3명씩만 진단을 받게 한 후 모두가 받은 것처럼 했다는 것이다.[2]


 어린 여공들에게 많은 연민을 가지고 있던 전태일에게, 조영래의 표현대로라면 ‘충격’적인 일이 어느 날 발생했다. 미싱사 처녀 한명이 작업 중에 새빨간 피를 재봉틀 위에 쏟아낸 것이다. 그가 급히 병원에 데려가 보니 폐병 3기였고, 그 여공은 매정하게 해고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십중팔구 차가운 판잣집 방구석에 누워서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어가거나, 살아도 폐인이 될 것이었다.[3]

 전태일은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왜? 왜? 왜? 어린 소녀들이 악덕 기업주들의 탐욕에 희생되어야 하는가! 청소년들의 장시간 노동을 금지한 근로기준법은 왜 존재하는가! 

 그는 임마누엘 수도원의 교회 신축공사가 있던 삼각산에서 인부노릇을 하던 70년 8월 9일 이런 일기를 남긴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재 일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4]


          

[1]조영래, <전태일평전>, 2020, 111쪽 

[2]조영래, 위의 책, 295쪽 

[3]조영래, 위의 책, 154~155쪽 

[4] 1966년 1월 18일 한밤중에 남산동 판자촌에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어머니 이소선도 두 눈의 시력을 잃게 되었는데, 천막촌 개척교회에서 100일간 새벽기도를 들여 시력을 다시 회복하게되자 전태일 가족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안재성외 4명, <아, 전태일>, 2020, 49~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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