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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석 Oct 04. 2022

건국신화, 제7장 경제신화의 비밀 김재익

대한민국 정통사관 제2부 

                 제7장 경제신화의 비밀 김재익 


 수어지교(水魚之交). <삼국지>에서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를 비유하는 말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말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국 경제사에서도 70년대 박정희와 오원철, 80년대 전두환과 김재익이 그런 관계였다.

 오원철은 일본의 사례를 들어 산업 고도화를 위해서는 ‘중화학공업 육성’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박정희에게 명료한 브리핑으로 전달하여 70년대 집중투자를 가능하게 하였고, 김재익은 지속적인 성장위주의 정책으로 발생한 과잉투자.통화폭증.높은 물가상승을 억제하는 ‘안정과 개방경제’로의 전환을 전두환에게 특유의 설득력으로 납득시켜 ‘중진국의 함정’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냈다.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입으로만 외친 극일(克日)을 독재자와 그 참모들이 사실상 이루어냈다. 잘못된 정치는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그 공은 인정하는 것이 공정한 역사관이다. 

 전두환은 86년 청와대에서 기술진흥 수상자들과의 만남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어떤 일본 사람한테 당신네가 어떻게 해서 미국을 추월했느냐고 물었더니 경제적인 측면이 아닌 정치적인 측면으로 설명을 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 설명인즉, 일본 자민당이 31년을 집권하면서 수상만 바꾸었지 모든 정책, 예를 들어 과학 기술투자, 수출정책 등은 일관성있게 밀고 나왔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우리도 앞으로 10년 정도만 과학기술 분야를 이런 식으로 끌고 가면 95, 96년 경에는 일본을 충분히 앞설 수 있다고 나는 믿어요. 우리 국민이 훨씬 우수하거든요. 

 미국은 그 동안 다섯 번의 정권 교체가 있었어요. 케네디가 3년반을 하고 존슨이 뒤를 이었지만 같은 민주당이면서도 그는 케네디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어요. 일본 자민당은 수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일관성있게 밀고 간다는 거지. 일본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미국을 이긴 것이라고 해요.”[1]


                     기득권과의 싸움, 설득의 예술 


  70년대 경제개발의 주역 중의 한명인 남덕우총리는  68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교환교수로 가서 김재익과 함께 1년 동안 수리통계학을 공부하면서 인연을 맺기 시작해,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으면서 김재익을 비서실장(74년), 기획국장(76년)으로 임명하여 그를 관료의 길로 이끌었다. 

 남덕우장관과 김재익의 첫 작품은 선진 세제인 부가가치세 도입이었다. 이 것은 미국과 일본 보다 앞선 정책이었다. 

 어느 날 남덕우는 김재익박사(경제학)를 불러 부가가치세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모든 거래 단계마다 부가가치가 발생하므로, 영수증발행의 일정율을 세금으로 흡수하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탈세가 만연한 사업자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 남덕우는, 제도가 시행중인 유럽공동체(EC)에 74년 여름 최진배 세제국장, 강동구 국제조세과장, 김재익박사,  서강대 김종인박사 등 4명을 파견하여 실태를 조사하게 하였다. 

 그들의 보고는 ‘즉각 도입’과 ‘충분한 홍보와 교육 이후의 도입’으로 갈렸는데, 남덕우장관은 배도 재무부 세정차관보의 의견에 따라 74년에 법안 작성, 75년 국회 상정, 76년 12월 부가가치세 도입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부가가치세 도입은 과세의 투명성과 공평성, 탈세 방지, 안정적인 세원 확보(정부 세입의 주축)를 이루어 경제 선진화의 한 축이 되었다.[2]

 이 과정에서 김재익의 온화하고 끈기있는 설득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거세게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특유의 명쾌한 설명으로 한명, 한명의 동의를 얻기 시작한 것이다. 


 1973년 내가(서영택) 재무부 세제국 직접세과장으로 있을 때 청와대 경제수석(당시 김용환 수석) 보좌관으로 있던 김재익씨가 나를 보자고 했다. 

 김재익박사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부가가치세 제도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어 이 세제의 장점에 매료된 사람으로 보였다. 커다란 종이에 도표로 부가가치세 제도의 이론적 장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나에게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면서 이 제도가 도입이 되면 우리나라 조세 제도에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고까지 말하고, 우리가 같이 이 부가가치세 제도도입에 힘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김박사는 정말 머리도 우수하고 논리가 정연한 분이었다. 한치의 틀림도 없이 수학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부가가치세 제도의 이론적 장점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몇 시간을 설명하며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이론의 당위성과 현실의 장벽 사이의 싸움이었다. 김박사는 결코 흥분하지도 않고, 또 대통령과 경제수석을 등에 업고 실무 간부들에게 권위적인 지시나 큰 소리 한 번 내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의견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본다. 

                                   고승철.이완배 공저, <김재익 평전>, 130~133쪽 


 김재익의 업적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은 역시 80년대의 물가를 안정시켜 한국 수출경제의 경쟁력을 지켜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 후반의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성장위주의 투자와 중동특수.수출증대 등에 의한 통화폭증과 2차 석유파동으로 물가가 폭등하였고, 중화학공업 집중투자로 주택 및 내구 소비재 공급부족의 ‘수요와 공급 불균형’이 심화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대통령도 창원공단 등을 시찰하며 중복투자의 실상을 깨닫고, 79년 4월 17일 ‘경기 안정화 종합대책’을 발표하였다. 생필품의 수급 원활화, 규제완화, 재정.금융 긴축,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 부동산 투기 억제, 영세민 생활 안정정책 등이 망라되었다.

[3]

 그러나, 박대통령의 성장위주 정책에 대한 신념에 따라 혁신적인 변화라고는 할 수 없는 정책기조의 상황에서, 박대통령 사망으로 경제정책의 일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물가와 임금의 고공비행 속에서 정치적 위기까지 맞은 대한민국호는 자칫 좌초할 수도 있었지만, 전두환대통령의 박대통령과의 차별화 욕심과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김재익경제수석과의 결합으로 한자리수 물가와 86년 사상 최초의 경상수지(무역수지) 흑자라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다. 

 김재익이 미국 유학 시절에 접한 강경한 자유주의 경제사상가 루트비히 폰 미제스(Mises, 1881~1973)는 ‘계획경제는 자의적인 경제 계산이 나올 수 밖에 없어 비합리적인 계산이 나올 수 밖에 없다’라고 주장했고, 김재익도 자유주의 시장을 신앙처럼 지지했다.[4]

 임금과 추곡 수매가, 기업투자를 억제한다는 정책은 경제주체들에게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당장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재정긴축은 실질 소득이 감소하는 것이었슴으로 당연한 반발이었다. 이에 정부는 물가가 안정되면 실질소득이 증가하게 된다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홍보, 교육하면서 여론을 안정시켰고, 전대통령의 강력한 신임을 받은 김재익수석의 활약 속에 한국경제는 과열을 막을 수 있었다.

 1980년 30%에 달했던 도매물가는 82년에는 4.7%, 83년에는 0.2%로 크게 낮아졌고, 소매물가는 80년 29%에서 82년 7.1%, 83년 3.4%로 안정되었다.[5]

 2천년대에 그리스와 중남미 등에서 자주 들려오는 몇십, 몇백프로의 물가상승은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1]김성익, <전두환 육성증언>, 92년, 169쪽 

[2]남덕우,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2009, 122~125쪽 

[3]남덕우, 위의 책, 183쪽 

[4]고승철.이완배 공저, <김재익 평전>, 97~110쪽

[5]전두환, <전두환 회고록>2권, 2017,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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