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진석 Sep 26. 2022

대한민국 정통사관, 겨울공화국을 무너뜨린 작은 불꽃

건국신화 제5장(2편) 

 전태일의 남다른 문장력의 글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소설 습작을 여러 개 남긴 문학청년이었다. 그의 일기와 편지에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영국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 김소월의 시 , <부활>, 모파상 등이 등장한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는 모범업체(태일피복)를 구상하고, 거액인 자본금 3천만원을 마련하기위한 계획을 그의 노트에 소설형식으로 작성하기도 했다.[1]

 또한, 전태일은 자신의 안구를 기증하여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투자할 독지가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관련 기사가 나온 <중앙일보>기자에게 실제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먼저 피조물의 제한된 능력 안에서 

 두눈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후진국의 맨 밑바닥에서 

 중진국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힘찬 전진을 

 계속하는 조국에 감사하면서.

  저의 한눈을 김형님게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사랑하고 보고 즐거워하며 삶의 보람을 느끼는

 발전해 가는 조국 건설의 웅장하고 믿음직한 

 여러 아름다운 실제들을 분리된 또 하나의 저인 

 김형에게도 보이고 싶습니다. 

 주사위계(필자 주, 중앙일보 칼럼) 선생님께서 

 이 일을 이루어지게 도와주십시오.(중략)[2]


                겨울공화국을 무너뜨린 작은 불꽃 


 산업현장 노동자들의 고난은 2천년대인 현재에도 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죽음으로 내몰리는 3D하청노동자들, 길을 잃은 청년실업자, 보이지 않는 그늘의 여성노동자들에게 실존하는 문제이다. 

 2006년 고용노동부의 통계에 의하면 전체 산업의 재해사망자는 2,453명이었고, 그 중 3D업종인 건설업은 최고 수준인 631명이었다. 한 주에 평균 10명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또한, 70년대 청계천 피복공단의 경우처럼, 영세한 건설현장에서 대부분의 재해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20억 미만 현장은 절반가량, 120억 미만 사업장은 70%가량)

[3]

 전태일은 이러한 노동자들도 생명을 지키고 행복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한 최초의 고발자였던 것이다. 

 

 대학사회는 충격 속에 그가 죽은 지 사흘 후인, 70년 11월 16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학생 100여명이 모임을 갖고 ‘민권수호학생연맹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여 서울법대 학생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겠다고 밝혔고, 11월 16일 오후 서울대 상과대학생 400여명이 집회를 열고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시기부터 대학생과 노동자와의 ‘노학연대’가 시작되었으며, 대학생들의 산업현장 진출의 출발점이 되었다.  

 정치권에서도 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대중후보와 박정희대통령이 근로기준법, 노동환경, 복지향상 등에 대한 공약을 들고 나올 수 밖에 없는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4]

 노동운동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한국노총이라는 어용노조를 거부하는 민주노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민주노조란 노동통제에 순응하지 않고, 현장 노동자들의 불만이나 고충을 대변하기위한 자주적인 조합 활동과 민주적인 조직운영을 보여 주었던 노동조합을 말한다. 

 70년 11월 27일 조합원 560명이 가입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필두로, 동일방직.콘트롤데이터.반도상사(부평지부).YH무역.방림방적.원풍모방.고려피혁.한일공업.롯데물산.세진전자.서통.삼원섬유.삼성제약.인선사 등의 10여개 사업장에서 민주노조가 만들어졌다. 

 이들 민주노조는 많은 성과를 만들었는데, 청계피복노조의 경우 체불 임금.퇴직금.해고수당의 문제해결, 근로시간 단축, 시다 직불제, 시장구역별 단체협약체결, 노동교실 운영 등을 이뤄냈다.[5]

 

 특히, 75년에 결성된 YH무역노조는 79년 8월 9일 부당폐업 저지를 위한 신민당사 농성을 통해 박정희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되었다. 

 여성 노동자 187명이 신민당사 4층에서 농성한지 이틀 뒤인 11일 새벽 2시경 경찰은 폭력적인 강경 진압작전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YH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영삼총재가 10월 4일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었고, 10월 16일 부산에서는 5만여명이 시위를 벌여 17개 공공기관 건물이 습격당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 현장을 방문하여, 연행자 160명 중에 학생은 16명에 불과하자 단순한 학원시위가 아님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고, 결국 그는 10월 26일 박대통령을 시해하고 만다.[6]

 70년 전태일의 작지만 거대한 불꽃이 겨울공화국을 태워버린 것이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YH김경숙’이란 시를 썼다. 

 ‘1970년 전태일이 죽었다/ 1979년 YH 김경숙(金京淑)이/ 마포 신민당사 4층 농성장에서 떨어져 죽었다/ 죽음으로 열고/ 죽음으로 닫혔다/ 김경숙의 무덤 뒤에 박정희의 무덤이 있다/ 가봐라’ 



          

[1]안재성외4명, 위의 책, 176~185쪽 

[2] <전태일기념관> 전시자료, 2022년 9월 

[3]신영철, <정의로운 건설을 말하다>, 2017, 51~56쪽 

[4]조영래, 위의 책, 347~352쪽 

[5]안재성외4명, 위의 책, 128~130쪽 

[6]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1970년대편 3권, 258쪽 



작가의 이전글 대한민국 정통사관, 대인 잡는 소인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