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론 제1장(2편), 스티코프 일기

대한민국 정통사관

by 현진석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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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북한정권의 수립에 얼마나 깊숙히 관여했는지는, 전현수교수가 2004년 발굴, 번역한 <쉬띄꼬프일기 1946~1948>를 통해 상당 부분 알 수 있다.

극동군사령부 최고위 정치장교였던 스티코프는 모스크바 중앙당의 직접 지시를 받는 군사정치위원이었다. 소련군의 조직은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직접 전투를 하는 전투장교와 공산주의 사상과 정치를 지도하는 정치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티코프상장(중장)은 2차 세계대전에서 메레츠코프원수 휘하의 소련군 제7군 군사정치위원이었으며, 독일군의 강력한 공격에도 레닌그라드를 끝까지 사수했고, 핀란드에 친소정권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여 ‘탁월한 정치군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메레츠코프를 따라 극동군에 배치되어 연해주군관구가 있는 하바로프스키에서 모스크바와 평양을 수시로 오가면서 소련군정을 감독하고 남로당의 활동을 지시했으며, 북한정권 수립의 설계자역할을 수행했다. 초대 소련대사를 51년 초 까지 맡았고, 여러 요직을 역임하다가 1964년 10월 2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한편, 미국은 명칭을 직접적으로 미육군 군정청(U.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으로 사용하였으나, 소련은 민정이란 이름으로 북한 주둔 제25군 사령부에 민정 담당 부사령관을 두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소련이 광범위하게 지시하고 관리한 것이 분명하므로 일반적으로 소련군정으로 부르고 있다.

[1]

슈티코프 일기에는 북한의 통치를 넘어서 남한에 대한 지령과 정치공작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1946년 9월 26일]

로마넨꼬(민정 담당 부사령관)에게 다음과 지시하다.

1. 북조선 지도자들과 여운형의 회담을 허용한다.

2. 남조선의 좌우합작운동을 저지한다.

3. 남조선 좌익 3당의 합당을 잠시 중단한다.

4. 공산당은 반드시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5. 민주주의민족전선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령의 취소, 감옥으로부터 좌파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한다.

6. 미군정이 남조선에 수립하려는 정부(입법의원)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중앙정부의 수립을 앞당길 것이기 때문이다.

7. 북조선의 상황과 북조선에서 실시되고 있는 민주개혁(필자-사회주의개혁)에 대해 설명해 준다. 북조선은 여운형을 신뢰하고 있다고 말한다.

8. 로마넨꼬에게 회담 준비를 위해 다음과 같이 지시하다.

1). 미소공동위원회 사업을 재개한다. (중략)[2]


위의 일기를 살펴보면, 소련군정이 남한의 좌파세력에서 직접적인 지령을 하달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여운형을 이용하여 남쪽의 좌파들을 조정하려고 하였는데, 결국에 그는 남과 북의 1인자들인 박헌영과 김일성에게 권력을 빼앗겨 암살되는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남한의 좌우합작을 반대하고 임시의회인 입법의원에 좌파의 참여를 불허하여, 자신들은 실질적인 행정, 입법기능을 행사하고 있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배후에서 조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안정을 위한 중앙정부 수립에는 방해공작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6년 9월 28일]

경제적인 요구들,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의 철회 등의 요구들이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한다. 이 요구들이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이다. 인민위원회로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정과 협상을 계속할 것이라고 성명한다. 파업투쟁의 조직자들과 참가자들에 대해 미군정이 탄압을 가하지 말도록 요구한다.

여운형과의 회담 및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스딸린 동지에게 암호전문을 보낸다.


남북한을 분할통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규모의 파업을 지시하고, 세부적인 활동까지 통제하는 심각한 수준의 미군정 파괴활동의 내용이다. 48년 북한정권의 수립에 있어서는 내각의 구성을 위한 초안까지 작성하였다.


[1948년 8월 27일]

(중략)

내각 성원

수상 김일성

부수상(미정) 부수상(미정)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민족보위상 최용건

외무상 박헌영 내무상 박일우

산업상 김책 체신상(미정)

농림상 송봉욱 재정상(미정)

상업상 장시우 교육상 백남운

사법상 최용달 문화선전상(미정)

국가검열위원장(미정) 보건상 이병남

체신상 주황섭 노동상(미정)

도시경영상(미정)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의장 김두봉 부의장(미정)

부의장(미정) 위원(미정)

(남조선) 국회의장(미정)


47년의 제2차 미소공위원회에서 미국대표단 브라운장군의 북한의 정치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지적도 기록되어 있다.


[1947년 7월 10일]

(중략)

미국대표단은 정당들을 믿지 않는 것은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 정당들에 대해 조사하자면 다른 정당들에 대해서도 조사해야 한다. 왜 북조선에는 1천 300만명의 주민들이 단 하나의 정치적 사조와 유파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는가? 왜 소련대표단은 이미 합의된 결정을 거부하는가? 소련대표단장은 소련대표단이 북조선의 정당명부를 제출할 것이라고 성명했다.

북조선에는 38개의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이 있는데, 이 모두는 전부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연결되어 있거나 혹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이다. 왜 다른 사회단체들은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는가? 소련대표단 혹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이 명부를 작성한 것은 아닌가? 이에 반해 남조선의 명부는(필자- 425개) 매우 길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양한 단체들이 있다. 이 횡단면을 통해서 우리는 남조선에서 광범위한 인민의 의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북조선에는 이것이 없다.

(중략)


그렇다면 미군정의 기본적인 한반도정책은 무었이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분명 미국은 소련과는 매우 다른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미국무부는 한정된 재정 안에서 주요 관심사인 유럽과 일본에 자원을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1차적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애치슨라인이 보여주듯 2차 세계대전의 동지였던 소련의 심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한반도에 미국적 민주주의국가 또는 최소한 중립국가를 건설해주고 가급적 빨리 철수하고자 하였다.

미국에서 동원해제령이 내려지고, 국방예산도 의회의 압박으로 계속 줄어들어 45년 8월에는 총 900억 달러였던 국방예산이 46년에는 485억 달러로 거의 절반으로 삭감되었다. 그 여파로 미군정의 전술군과 군정요원의 규모는 45년 10월에 77,643명에서 46년 10월에는 37,918명으로 격감되었다.[3]


이러한 재정의 절대적 부족은 해방 이후의 극심한 혼란기에 치안의 붕괴와 좌파세력의 선전선동에 훌륭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미군정은 경찰인력을 가급적 일본에 부역하지 않은 인물들로 기용하려고 하였으나, 잘알려진 것 처럼 교육 받은 한국인과 관료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여 미숙한 정책실행으로 궁지에 몰린 미군정은 45년 11월 17일경부터 일시적인 조치라는 명분으로 간부직 경찰직을 중심으로 복귀를 허용하고, 출근을 거부하는 한인 경찰들을 체포령으로 협박해 복귀를 종용하여 45년 말에 겨우 경찰력을 안정시켰다.

국민정서를 반영하여 악명 높은 친일경찰들에 대한 조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45년 10월 경무과장 조병옥은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조선민족의 의사를 말살했거나 인권을 유린한 자 혹은 직책을 남용한 경관은 점차 숙청할 것이라고 밝혔고, 경기도 경찰부는 46년 2월 13일에 악질 친일 경찰들을 구속했다. 중국군 출신의 김응조를 초대 전라도 경찰청장으로 임명하기도 하였으며, 일제경찰의 상징이었던 패검을 곤봉으로 교체하였다.[4]


미군정 초기의 기본 정책방향은 미국외교기밀문서(FRUS, 1945, VOL.6)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45년 10월 17일 SWNCC(삼성조정위원회)에서 태평양방면 미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원수에게 보내진 ‘초기 기본 훈령’에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대한반도 정책의 3단계는 첫째, 미소간의 민간 행정 업무담당이라는 초기의 과도적 단계 둘째, 미영중소의 신탁기 셋째, 국제연합 회원국 자격을 갖춘 궁극적인 한국의 독립(the eventual 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5]

즉, 외교적 관계를 고려하면서 서방의 기준에 적합한 독립국가의 건설이 최초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민족을 위하여


조선말기부터 6.25전쟁까지 한반도는 외세에 의한 극심한 고난의 역사라고 하지않을 수 없다. 의병전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대규모 정규군의 전투는 없었고, 45년 해방을 위한 번듯한 독립전쟁도 없었다. 어쩌면 해방 이후의 많은 민간인희생과 6.25전쟁시의 수백만명의 사상자는 민족의 ‘늦게 흘린 피’라고 할 수 도 있겠다.

악명 높은 두 외세인 소련과 미국은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에서 각각 천만명이 넘는 희생자와 수십만명의 전사자를 냈지 않은가 말이다.

민족을 친일과 항일로 나누는 무리들이 있지만, 저열한 위정자들의 지리멸렬로 졸지에 나라 잃은 백성이 된 조선민중에게 과연 자랑스럽게 다시 세울 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했는가! 수십년 지속된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식민지국민으로 죽은 민중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극소수의 악질 민족반역자에 대해서는 응당 끝까지 역사적 죄과를 물어야 하겠지만, 대부분이 소규모 농업에 종사하며 5남매~9남매의 농촌가정에서 상속에 불리했던 차남 이하의 남성들이 생존과 신분상승을 위한 일본관리, 경찰, 군인 등에 지원하고 삶을 영위한 것을 쉽게 매도할 수는 없다.

인촌 김성수와 송진우, 함석헌 같은 분들은 적극적 항일투쟁이 거의 불가능했던 국내에서 교육, 언론, 민족자본을 통해 민족의 힘을 키우려 노력했던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제에 대한 형식적 협조는 사실상 불가피했다. 친일파라는 용어가 마치 민족반역자와 동일시되는 상황에서, 빨치산투쟁과 임시정부의 독립투쟁만이 의미있는 것이라고 주장되어서는 안된다. 국내의 온건한 민족주의자들과 국외의 항일민족주의자들의 축적된 역량이 합쳐진 결과가 대한민국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의 공산항일투쟁만이 유일한 민족해방의 금자탑인 것 처럼 선전하지만, 실상은 중국공산당 당적으로 소규모 전투와 보급투쟁에 주력하였고, 소련군 대위의 신분으로 첩보활동을 한 것이지 진정한 민족독립을 위해서 큰 업적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결정적으로 그는 수만명의 중공 조선의용군을 지원받고 스탈린으로 부터는 수백대의 탱크와 중화기, 군사고문단을 지원받아 외세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의 터전을 폐허로 만들고 산하를 피로 물들인 진정한 민족반역자인 것이다.

수정주의 역사관은 분단과 전쟁의 책임을 미국과 소련의 공동책임으로 보는 주장이다. 하지만 민족의 입장에서 더 큰 책임을 물을 대상은 소련과 스탈린에게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미국은 정책도 매우 미숙했고 재정의 투입도 빈약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정치의 공간을 마련해주고 최후까지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한 반면에 소련은 초기부터 폴란드와 같은 위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인민위원회의 출범, 토지개혁의 실시, 중앙은행의 설립 등의 사실상의 단독국가적 행정을 집행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 자격을 논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비선출권력의 부당함에 저항하여 북한주민 100만명이 월남했고 6.25전쟁시에도 또다시 수십만명이 남으로 내려온 것이 그들의 자격없음에 대한 명백한 증거다.[6]

해방 이후 미국의 한반도 독립국가의 프로젝트와 소련의 한반도 위성국가의 프로젝트를 비교하면,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더 나은 정책방향은 그 것이 냉전의 결과였다고 하더라도 미국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1]안문석, <북한 현대사 산책>, 30쪽

[2]전현수, <쉬띄꼬프일기1946~1948>, 17쪽

[3]이택선,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51쪽

[4]이택선, 위의 책, 77쪽

[5]정경환, <해공 신익희 연구>, 289쪽

[6]북으로 월북한 인원은 2만5천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은 100

만명의 월남인이 바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말해준다고 언급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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