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문제의 진단, 인식과 재인식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갑자기 막을 내린 10.26을 불과 며칠 앞둔 79년 10월 15일에 <해방전후사의 인식>1권이 발간되었다. 5.18의 비극과 함께 신군부의 가혹한 철권통치에 저항하는 종북사관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매우 강력한 전체주의 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존재는, 저항세력들에게 주체사상이라는 정치사상과 항일민족주의세력의 정통성이라는 역사관을 전달하여 강력한 반정부투쟁의 사상적 터전을 만들어 주었다. 이 운동권세력은 김대중정권, 노무현정권을 거치면서 현실 정치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 언론, 학계에 대거 진출하여 강력한 헤게모니를 가지게 된다.
이에 반하여 우파의 위기를 맞아 새로운 우익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2005년 11월 8일에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발족되었고 2006년에는 명망있는 경제사학자였던 서울대 안병직 명예교수가 뉴라이트재단을 창립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2006년 2월에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권을 출간하여 그들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게 된다.
이들 주장의 중심에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근대화론과 이승만재평가가 있는데, 합리성과 객관적 비판이 상당히 부족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상대편으로부터 신친일파라는 강력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종북사관과 뉴라이트사관이 식민지지배와 분단과 전쟁이라는 민족의 크나큰 고난에서 출발한 것이어서,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삐둘어지고 극단적인 내용을 가지게 된 것은 민족의 또 다른 고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정통성의 위기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대표적인 주장은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의 친일논란일 것이다. 이승만과 친일에 앞장 선 한민당세력이 반민특위를 무력화하여 민족정기를 무너뜨리고 미국의 지배를 받는 반민족친일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새나라의 구상이 그 어떤 종류의 것이든 그것은 적어도 하나의 필수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내용이어야 하리라고 믿어진다. 그것은 다름 아니고 일제 잔재를 뿌리뽑고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을 거쳐 이승만정권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반민족적 친일세력은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여전히 실권적 또는 지도적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국민 대중은 ‘민족적 정의의 부재’를 실감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민족적 정열과 애국심을 흐리게 하고 개인의 영달과 실리만을 좇는 이기적 타산 풍조를 낳게”되었던 것이다.(해방전후사의 인식1권, 617쪽)’
인식이 권수를 늘려가면서도 초기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크게 부정하지 않았는데, 아직 군부독재시대였고 자신들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1948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 총회는 한국임시위원단의 전기(前記) 보고서를 상정 논의하였다. 미국의 주도 아래 총회는 12월 12일 48대 6(기권 1)의 압도적 다수로 한국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 결의문은 “임시위원단이 관찰 하고 협의할 수 있었고 전체 한국인의 대부분(great majority)[1]이 살고 있는 한국의 한 부분(the part) 위에 효과적인 통치와 관할권을 갖는 합법적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지적하고, 이 정부는 “한국의 그 부분의 유권자의 자유로운 의사의 유효한(valid) 표현이었던 선거에 기초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 다음 이 결의문은 이것이 “한국에 있는 유일한 정부이다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고 강조하였다.
요약하면 이 결의문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역에 걸친 전국적 정부라는 것은 조심스럽게 피했으나 그렇지 않다고 특별히 선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유엔 총회의 결의가, 특히 이러한 국제적 뒷받침이 전혀 없었던 북한 정권에 비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여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해방전후사의 인식1권,110쪽)’
선출권력을 위한 합법적이고 자유로운 선거와 국제기구에 의한 감시가 실시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북한에서는 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흑백투표함을 각각 두고 찬성하면 백색투표함에 반대하면 흑색투표함에 넣게하여 사실상 공개투표를 함으로써 도저히 인민들이 자유롭고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다고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주화운동이 사회 전반적으로 팽창하던 1988년에 출간된 <인식4권>에서는 마침내 학생운동권을 장악한 주사파세력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대담한 부정을 주장하는 단계까지 도달하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지배하에서의 구조화된 한국사회의 성격을 감안할 때, 일제라는 국가권력이 붕괴된 해방의 시점에서 요구되는 혁명의 내용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 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반제반봉건의 내용을 지닌다. 우선 식민 잔재의 척결이 요구되었다. 식민 잔재의 척결에는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처벌과 일제 및 친일매판자본가 기업의 국유화 등이 요구되었다. 즉 식민 잔재세력의 물적기반을 박탈하고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약화시키는 것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봉건 잔재의 척결이 요구되었다. 봉건 잔재의 척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토지개혁이었다. 둘째, 그것은 일종의 인민민주주의혁명이었다. 민주주의혁명이 국가의 강력한 파쇼적 성격에 대응하는 민중의 혁명이라면 당시의 혁명은 식민성과 봉건성으로 야기된 일제 식민지권력의 파쇼적 성격에 반대하여 노동자.농민 등 민중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인민정권을 수립하고자 하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이었다. 따라서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당시의 객관적 조건 속에서 혁명의 주체세력이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이 국가권력에 바탕하여 반제반봉건의 민주개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정해구,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 19쪽
이러한 주장은 45년 해방 당시의 박헌영이 주장한 유명한 ‘8월 테제’와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즉, 아직 완전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시기가 성숙하지 않았으니 우호적인 자본가와 정치세력들과의 결합을 통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1차적인 단계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조선의 객관적 정세(경제, 정치, 사회적)는 우리로 하여금 무조건하고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제 과업의 수행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오, 조선에서는 프로레타리아혁명의 단계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힘있게 주장한다.(박갑동, <박헌영>, 307쪽)
여기에서 중대한 문제로 보이는 것은, 그 혁명은 대체 누구의 권리이며 어떤 자격자가 해야하는가 하는 것이다. 분명 북한과 남한의 자유로운 정치활동 속에서 합법적 선거로 선출된 정치권력이 실행해야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소련군정은 해방 이후의 통치에서 강력한 통제를 통해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공산당세력 일색으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소위 민주개혁을 하였으니 북한민중들이 결코 승복하지 못한 것이고 해방전 100 만명, 전쟁시 수십만명이 남한으로 내려온 것이다.
[1]해방 당시의 인구는 남쪽이 1,600만명이었고 북한은 900만명이었으며, 북한에서 일방적 사회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지배적 세력이었던 기독교 지식인들과 지주들 100만명이 남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