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통사관, 항일 민족주의자와 온건한 민족주의자

대한정통론 2장(2편)

by 현진석

뉴라이트사관의 등장


90년대에 보수정권이 진보정권에 의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자, 위기의식 속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2000년대 이명박정권에서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핵심적인 내용으로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근대화론, 이승만재평가, 친일선동반대 등이 있다.


대표적 학자인 이영훈교수는 종북사관적 민족주의자들을 ‘선악사관’으로 규정한다. 종교적 확신을 가진 사물의 인과를 한 가지 근본요인으로 귀결시키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일종의 종교적 확신에서 그 특별법(일제 강점하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했다. 이 법의 제정에 공로가 컸던 당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위원장 이만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방 후 한국사회의 원죄와 같은 존재이자 일제 식민 잔재의 핵심요소인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청산 없이 낡고 병든 과거와 단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친일파는 한국사회에서 원죄와 같은 존재이다. 원죄는 인간을 죽음의 절망으로 이끈다. 인간은 자비로운 신에게 그 원초적 죄성(罪性)을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받아야한다. 그렇게 원죄와 같은 친일파를 청산하면 한국사회는 신의 정의로움을 회복할 것이다. 나아가 친일파 그들의 더러운 영혼도 구원을 받게 된다.(해방 전후사의 재인식1권, 이영훈, 51쪽)

식민지근대화론은 낙후되고 양반들에게 착취받던 조선민중이 문명개화된 일본에 의해 법치가 도입되고 교통, 보건, 경제가 모두 발전되어 정치적 억압은 있었지만 한반도에 큰 혜택을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지나치게 미군정과 이승만을 악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종북사관처럼, 근본적인 한반도지배의 목적이 자국의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였던 일본을 지나치게 선량하게 인식한 역사적 진실과 실제적 사실에 어긋난 주장이다.

일본본토의 산업과 경쟁관계에 있는 부분은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할 것이 분명함으로 투자와 육성을 외면하고, 인구에 비하여 절대농지가 부족한 벼농사의 단일품종으로 조선산업을 경영하여 생산량과 자연재해에 따른 가격변동에 매우 취약한 산업구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무비판적인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임금정체와 소득분배 악화현상은 일제하에서 경제성장이 없었거나 기형적이거나 부실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 경제성장이 진행되는 가운데, 근대 의학 및 공중 보건제도의 전면적 도입에 따라 갑작스럽게 사망률만 낮아져 인구구조 및 노동시장의 규형이 깨진 결과일 뿐이었다. 비숙련 노동자집단의 소득향상이 뚜렷하지 않았던 것은, 전통 조선사회가 근대 세계에 개방되어 근대 사회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근대 경제성장의 불가피한 산물이었다.(해방전후사의 재인식1권, 127쪽)’


산업뿐만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도 일제는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인들이 많아지면 자치와 독립의 요구가 많아질 것을 우려하여 일본에서는 의무교육을 실시하면서도, 한국에서는 현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를 수료하는 인원도 남녀를 합쳐 50%정도에 머물렀고 전문기술자 양성에도 소극적이어서 해방 이후 적산공장을 운영할 기술자가 없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30년대 후반에는 만주국이라는 큰 시장이 생겨나서 북한지역에 중화학공업투자가 많이 발생하였으나, 대부분의 자본과 기업주가 일본인이어서 이윤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민족자본이라면 대지주였던 인촌 김성수가 설립한 경성방직을 포함하여 매우 소수에 불과하여[1], 은행에서의 대출과 공장허가, 토목사업 허가권을 70만명의(해방 당시의 인구) 일본인에게 몰아준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조선은 해방될 때까지 공장의 수도 제한되었고, 공장에 종사하는 인구도 매우 적은 한정된 공업발전밖에 하지 못했다. 때문에 거시적인 시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에 쌀의 모노컬처 경제(monoculture economy)를 강제했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이 궁핍했던 원인은 수탈에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쌀의 모노컬처 경제였다. 더욱이 1920년부터 쌀가격이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을 보였으므로, 궁핍한 것은 당연했다. 개발도상국 대부분이 그다지 수탈당하지 않았는데도 가난했던 이유는 모모컬처 경제 때문이다. 한 종류만 생산하니 그 가격이 낮아져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대부분의 농민은 일본이 필요로 하는 쌀을 강제적으로 생산해야만 했고, 경작작물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다. 쌀 가격이 내려가도 어찌하지 못했다.

도리우미 유타카, <일본학자가 본 식민지 근대화론>, 42쪽


항일 민족주의자와 온건한 민족주의자

소앙과 인촌.jpg

30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문화, 역사학계의 전방위적인 ‘친일과 항일’의 이분법적 역사관은, 북한 항일역사의 선명성을 강조하는데 봉사하는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면서 대한민국국민들을 양 극단으로 갈라놓고 있다. 그렇다면 99% 아니 99.9%의 일제 식민지국민들은 친일부역자라는 죄책감을 원죄를 영원히 가져가야한단 말인가?

미군정 입법위원에서는 친일파와 관련된 처벌대상을 아래와 같이 예상하였었다.


기초위원회로서는 부일협력자의 수를 전 국민의 약 0.5퍼센트 10만 내지 20만, 민족 반역자의 수를 약 0.003퍼센트 천명 내외, 전범자 수를 약 20~30명, 간상배의 수를 약 0.05퍼센트 만 명 내지 2, 3만명 정도로 가상하여 보았다.

최태신, ‘민족 반역자 부일협력자 심의 방청기’에서[2]


한반도의 인구로 따지자면 40년대의 국내와 국외의 항일운동가를 모두 합쳐도 1%정도의 수준에 불과할 것인데, 친일이냐 아니냐로 국민을 나누는 정치선동은 억지이고 시대착오적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오로지 공산빨치산투쟁만이 민족을 위한 것이고 높임을 받아야한다는 주장은, 일제의 강력한 억압 속에서 민족의 역량을 키워나가며 민족의 이익을 지키려했던 조선민족에 대한 모욕이다.

하물며 김일성일파의 대단치 않은 투쟁경력과 중국공산당,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이익에 우선적으로 봉사하다가 결국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아시아 패권책략에 자발적으로 동조하여 민족을 불구덩이로 던져버린 일당들을 민족의 최고영웅으로 칭송하는 것은 완전한 희극이다.

한편, 뉴라이트사관은 식민지근대화론을 필두로 일제찬양, 무비판적 이승만찬양, 독립운동가 모욕을 일삼는 신우익이라 불리는 세력까지 탄생시키며 또다른 시대착오적 역사관을 대중들에게 전파시키고 있다.

이들이 큰 세력도 확보하지 못하고(종북주의자들과 달리) 제도권에도 대부분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역사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한반도 지배목적은 자신들의 이익이 최우선이었고, 우파가 계속 좌파에게 공격받는 원인이 이승만의 불명예 하야와 박정희의 죽음에 따른 5.18의 비극이었으며, 민족의 존엄을 위해 풍찬노숙하며 싸워나간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기 바쁜 이들의 주장이 한국민족의 상식적 정의관과 역사관에 부합하는 것인가?

종북사관과 뉴라이트사관 모두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역사를 쓰지 못하고, 특정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편협한 역사관이므로 21세기 대한민국을 위한 원대한 역사관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필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역사관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을 국외의 항일독립운동가들과 국내의 온건한 민족주의자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 북에서 내려온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합작으로 보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상징인 김구를 포함하여 최고의 이론가였던 조소앙, 실무를 담당했던 신익희, 광복군사령관 지청천,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 김구의 아들이며 공군사령관 김신, 미군정 통위부장 유동열, 민정장관 안재홍,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등등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대한민국 건국에 동참했다. 김구의 경우 반공민족주의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남북협상 당시 북한에 남으라는 김일성의 회유에도 남한으로 귀환하였고, 49년 당시 이승만정권과 북한을 함께 비판하고 정치세력을 키워나가며 정치적 재기를 도모하던 중이었다.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은 31년 만주사변 이후 비합법적 독립운동은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민족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소극적 협력을 통한 정치적 모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민족을 배신한 매우 적극적인 친일협력자들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국내 민족실력 양성지향의 인물은 인촌 김성수이다. 2009년 (사)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지만, 일제시대를 실제로 살았으며 고통 받았던 사람들이 선정한 48년 반민특위, 2002년 굉복회의 친일파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아 동시대의 민족동포들에게는 양심적인 민족주의자로 인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3]

강제 동원된 노동자는 억울한 희생자로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강제 동원된 연설가와 예술가들은 친일 부역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합당한가.

김성수는 송진우, 김병로 등과 함께 호남 대지주 가문의 일원으로서 민족언론, 민족교육, 민족자본을 위하여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동아일보을 설립하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하교 인수 및 운영, 규모 있는 조선인기업이 매우 희소하였던 상황에서 경성방직을 설립하였으며 3.1운동 당시에는 많은 자금을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에는 한민당의 주요 인물이었고, 51년에는 제2대 부통령이 되어 전쟁하에서의 국정에 참여하였으며 52년 이승만의 부산정치파동을 맞아 민주주의 유린에 분노하여 사직하였다.

외세에 의한 독립과 냉전의 시작으로 국토분단이라는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불굴의 독립혼을 불태웠던 임시정부 주도의 해외독립운동가들과 일제의 가혹한 강압에 비굴한 복종과 소극적 협력을 해야했던 국내의 온건한 민족주의자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소련의 강압적인 통치와 위성국가건설에 항의하며 남한으로 내려온 수많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남로당좌파의 격렬한 폭력투쟁과 외세를 끌어들인 진정한 민족반역자 김일성, 박헌영의 공산주의자들에게 피 흘리며 지켜낸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1]조선인들이 가난하였던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대부분이 소작농이라서 쌀의 일본 수출(이출)에 따른 이익을 대지주들이 가져갔기 때문이다.

[2]임헌영, ‘해방 후 한국문학의 양상’, <해방전후사의 인식1>, 657쪽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자로 686명을 선정하였다.

[3]김남채, ‘대인 잡는 소인배’, <인촌 김성수>,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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