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통사관, 김일성장군의 전사

대한정통론 제3장(2편)

by 현진석

제 2 또는 제3의 김일성

김일성 최현(우).jpg

80년대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북한의 김일성은 전설적인 영웅인 ‘진짜 김일성장군’이 아닌 가짜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는데, 주체사상파의 종북사관이 널리 퍼지면서 북한의 김일성이 바로 그 유명한 김일성장군이 맞다는 주장이 많이 확산되었다. ‘가짜 김일성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2~3명의 독립운동가 김일성이 존재한 것도 아니고, 죽은 김일성장군의 이름을 북한이 이어받은 것도 아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일성이 바로 북한의 김일성이다. 그런데 북한은 역사적 사실에 살을 엄청 붙이고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꾸며 김일성을 우상화했다.’[1]

하지만 이런 주장은 김일성장군의 명성이 북한의 김일성이 활동하기도 전인 20년대에 벌써 존재했고, 이명영교수가 일본을 방문하여 당시의 토벌대 일본장교들의 증언을 직접 들은 내용이 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어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그래서 본 저작에서는 제1의 김일성장군이 존재했고, 만주에서 성행한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다시 사용하는 전통을 이어받은 제 2, 제 3의 김일성이 존재한 것으로 보고 글을 이어갈 것이다.

한국과 만주지역에서는 두 명의 원조 김일성장군이 알려져있는데, 이명영은 <김일성열전(1974)>에서 본명이 김광서이고 김일성과 김경천(金擎天)이라는 가명을 쓰는 함경남도 북천 출신의 인물이 바로 그라고 주장한다.

김광서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3.1운동에 자극받아 만주로 망명하여 일본 육사 3년 후배인 지청천(또는 이청천)과 한국군관학교 출신 신팔균과 의기투합하여 독립운동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고, 다 같이 천(天)자가 들어가는 호를 지으니 신팔균은 동천(東天), 지석규는 청천(靑天)이었으며 김광서는 경천(擎天)이었다.

‘1922년 2월 중순 이래 동부 시베리아, 특히 연해주에서 백군(白軍)이 쇠퇴하고

적군(赤軍)이 대두함에 따라 김광서가 거느리는 약 6백명의 선인단(鮮人團)은 적군에 가담했다. 최근 이만 부근에서 백적 양군이 충돌할 기회에 그들은 황군(皇軍)에게 저항했는데 그 기세는 마치 무력부흥을 느끼게 한다. (조선군 참모부의 연해주방면 정세보고문서 <조특보(朝特報> 제 17호 1922년 5월 23일)’[2]


반면, 중국 연변 출신의 작가인 유순호는 본명이 김훈인 양림(楊林)이 제1의 김일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평안북도 출신으로 20년 5월에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여 10월 북로군정서 중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다. 25년 2월에는 황포군관학교 제1차 동정대(東征隊) 학생대대 제 4대대장으로 반군벌투쟁에 참가하였다. 5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 인민혁명군 장교와 동만특위 군사위원회 서기 등으로 활동하다가, 36년 2월 섬북(陝北) 부근의 도하작전에서 제15군단 5사 23단 1대대를 인솔하다가 전사했다.

[3]

제2의 김일성은 이명영이 당시의 함흥지방법원 형사부 ‘혜산사건 판결서사(1941)’를 근거로 1901년생인 함경남도 출신의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소련군에서 만주공산유격대에 파견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4]

1937년 6월 당시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군 6사장이 바로 제2의 김일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명영교수의 책에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월간 잡지 <삼천리> 37년 10월호에 장백현의 김정부(金鼎富, 73세)라는 노인이 돈과 물자를 받아내기위해 납치되어 김일성부대에 잡혀간지 7개월만에(37년 4월)에 탈출한 후의 인터뷰기사이다.

( 그는 유격대근거지에서 김일성부대장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는데, 김일성은 후리후리한 키, 우락부락한 말소리, 평안도말씨의 30세 미만의 청년이며 중국말을 잘한다고 진술했다.[5]


인물의 묘사가 북한의 김일성과 흡사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진짜 김일성일까?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항일유격대나 마적두목들이 대부분 가명을 쓰고,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대역(代役)을 이용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본명이 김성주인 북한의 김일성이라는 이름도 가명이고[6], 35년 2월 이홍광(李紅光)부대에게 납치된 일본인이 만난 남장을 한 19세 정도되는 미모의 여성이 이홍광사장이었다고 알려진 것이다. 물론 나중에 밝혀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 이홍광사장은 경기도 용인 출신 25세의 건장한 남성이었다.[7]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보안을 생명같이 여기던 빨치산유격대에서 부대장의 정체를 그렇게 허술하게 노출할 까닭이 없다. (이명영은 <삼천리> 37년 10월호를 발견한 경위를 설명하는데, 북한의 김일성에게 불리한 자료는 인멸되고 일본의 도사관에서도 오려져있는 것을 보았던 그가 수십년만에 삼천리발행인인 김동환의 아들 김영식씨가 고서점을 통해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고 진본을 확인했다는 것이다.[8])

이명영은 73년에 일본 하카다에서 만주군 토벌대 장교였던 야기 하루오(八木春 雄)를 만나 6사장 김일성의 전사장면을 전해 들었다.

‘일.만군 부대는 한인들이 많이 섞인 부대가 양목정자 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얻고, 마침 김일성부대가 관내에 들어왔다는 정보도 있었던 터이므로 필시 김일성부대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쫓아갔다. 아침 식사준비를 하느라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복을 입은 여대원 5, 6명이 재봉 일을 하는 것도 보였다.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가서야 교전이 벌어졌다. 대장인 듯한 사람이 총에 맞고 쓰러지자 ‘김 사령(司令) 죽었다’를 연발하며 공비 대원들이 반격해 왔다.

죽은 김 사령의 시체를 놓고 쟁탈전이 벌어지기 5시간여에 공비부대는 김 사령의 시체를 버린 채 도주했다. 목(首) 실험이란 것은 시체가 누구냐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데, 내가 그것을 담당했다. 1936년 6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부대가 산영자(山營子)란 부락을 습격했을 때 부락민을 모아놓고 김일성이 직접 선전 연설을 한 일이 있어 그들은 김일성의 인상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보였더니 틀림없는 김일성 사장(師長)이라는 것이었다. 나이는 내가 보기에는 35~36세 가량이었다고 기억한다.’[9]


한편, 보천보사건은 1937년 6월 4일 308가구, 경찰 주재원 5명에 불과한 산골마을을 습격하여 파출소, 학교 등을 방화하고 주택과 상가를 약탈한 사건으로, 일본 상인 1명이 사망하고 일본 경찰관의 두 살짜리 딸이 유탄에 맞아 죽은 사소한 보급투쟁이었는데, 북한의 김일성인지 다른 김일성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보천보에 가지도 않았다는 것이 습격에 참여했던 유격대원들의 증언이다. 다음은 보천보사건 당시 경위중대 기관총 소대원이었던 강위룡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박경환(가명, 요령시 안산시 거주, 1987)의 증언이다.

‘…그때 다른 사람이 ‘강 국장(강위룡은 용정현 부현장과 용정공안국국장이었다.)은 김일성의 경위원(경호병)이었으니, 혹시 김일성한테 축지법이라도 배운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강위룡은 너털웃음을 쳤다. ‘축지법은 무슨 개뿔.’이라고 했다. 보천보이야기도 그때 나왔다. ‘김일성이 나뭇잎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는게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보천보에 오지도 않았다.’고 대답했다.

여기까지는 내가 직접 강위룡한테 들은 이야기다. 그런데 후에 듣자니 강위룡이 북조선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하마터면 숙청당할 뻔했다고 한다.(중략)’

[10]

마지막으로 1934년 나자구전투(블라디보스톡 북서쪽) 때 용맹을 떨치던 (제 2의 김일성인지 북한의 김일성인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김일성부대에 대한 증언인데, 비록 공산주의자들이었지만 망국의 백성이 되어 만주의 산하에서 중국공산당과 일본토벌대에게 희생되어 뜨거운 피를 흘린 수많은 무명 항일유격대원들의 명복을 빈다.


‘문 대대장 이름은 문성만인데 동녕현성 사람이었다. 노아령의 바투라는 큰 만주족 동네 족장이었다. 그 동네 사람 대부분은 노아령에서 삼림 채벌이나 사냥을 주업으로 하고 살았다. 문 대대장은 만주사변 이후 동네에서 총 가진 젊은이들을 모조리 모아 만주군으로 편성했다. 나자구전투 때 문 대대장은 병사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김일성이라는 아주 지독하게 악질인데다 싸움 잘하는 유격대가 나자구 근처까지 왔다면서 우리가 선수 쳐서 먼저 습격하자고 했다. 그런데 습격하러 갔던 부대가 매복에 걸려 30여명이나 죽었다. 한 해 전 구국군이 동녕현성을 공격할 때도 서산포대를 습격한 것이 김일성부대였고, 나자구에서도 부락 서쪽 박격포 진지를 날려 보낸 것이 김일성부대였다. 김일성부대 대원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아주 싸움을 잘하는 부대로 소문났다. 그때 김일성은 중대장 아니면 소대장이었을 것이다.’[11]


[1]위의 책, 65~66쪽

[2]이명영, <김일성열전>, 1974, <김일성 신화의 진실>에서 재인용, 32~34쪽

한편, 소련계 조선인 임은은 <김일성정전(1989)>에서 김경천은 블라디보스톡의 극동조선사범대학에서 군사교관을 맡았으나 무장투쟁을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3]유순호, <김일성1912~1945>, 2020, 227쪽

[4]혜산사건이란 보천보사건을 관할한 혜산경찰서에서 나온 이름이다,이명영, <세기와더불어는 어떻게 날조 되었나>, 2021, 172~174쪽

[5]위의 책, 146~149쪽

[6]마침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별명을 쓰고 있어서, 위장전술로는 훌륭한 것이었을 것이다

[7]위의 책, 149~150쪽

[8]위의 책, 186쪽

[9]이명영, <김일성열전>, 김용삼<김일성 신화의 진실>에서 재인용, 214쪽

김일성의 전사는 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에 실렸다. ‘…19세 때 인민전선의 메카 모스크바에 잠입…녹림 유일의 인텔리 김일성은 곧이어 도당의 수괴에 앉혀졌으며…김일성은 토벌군에 쫒겨 드디어 36세를 일기로 악몽을 청산, 파란 많은 생애의 막을 닫았다.’

[10]유순호, <김일성1912~1945>하권, 108~111쪽

[11]장택민(蔣澤民), 중국인, 항일연군 생존자, 취재지 요령성 심양(2000~2001), 유순호, <김일성1912~1945>상권, 5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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