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론, 제4장 식민지조선 2등 신민들의 삶

대한민국 정통사관

by 현진석

제4장 식민지조선 2등 신민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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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인구는 1910년의 13,128,780명에서 1943년 25,827,30명으로 거의 2배가 되었다. 그것은 위생보건의 향상에 의한 것인지 출생률의 높은 증가로 인한 것인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1]

하지만, 고등학교제도를 도입하지 않아 일본본토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려면, 일본의 고등학교과정을 수료한 후에 입학이 가능한 지경이어서 조선인들을 일본인의 농노(農奴)로 삼으려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현재의 중학교인 고등보통학교는 5년제(1920년)였고 4년제 대학은 경성제국대학이 유일하였으며 학부도 법문학부와 의학부 2개 학부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정치학부와 경제학부에 들어가려면 일본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할 수 밖에 없었다.[2]


조선인들은 1922년 11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결성하여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 당국의 방해와 극심한 홍수, 가뭄이 발생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식민지조선에는 소수의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의 실용 위주의 전문대학만 존재하게되어 해방 당시에 극심한 인재난을 겪게된 것이다.

1910년에서 1943년까지 미곡의 경작면적은 12% 증가했고 수확량은 80% 증가하였는데[3], 대부분 대지주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대량의 쌀이 일본으로 이출(수출)되어 소작농들은 늘어난 인구에 따른 인구압력과 영세한 농업규모로 인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30년도에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에 중화학공업이 크게 발전하였지만, 대형 공장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소유였다. 1944년에 납입자본금 백만엔 이상으로 한반도에 본점을 둔 공업회사는 213개사였는데 그 가운데 91.55%에 해당하는 195개사가 일본인 소유였고, 조선인 회사는 18개사 8.45%에 불과했다.[4]‘식민지근대화론’의 허망한 내용이다. 빈 껍데기였던 것이다.

자본과 전문기술을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 광공업 공장의 운영 기술자가 턱없이 부족하여 남북한은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소련군정은 급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일본인 기술자들을 억류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미군정은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공장 가동률이 급격히 떨어져 해방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한편, 남한에 돌아온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북한의 빨치산부대들 만으로는 행정력과 지식인이 매우 부족하였으므로, 모두 일본에 유학한 제국대학 전문가들을 적극 유치하였다. (북한에는 조선계 소련인 수백명 이상이 입국하여 사회주의화와 행정업무를 지원하였다.)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교수였던 리승기는 해방 이후 서울대에 잠시 있다가 월북하여 합성섬유 ‘비날론’을 개발하여 북한 주민들의 의생활에 크게 기여하였고, 같은 대학 이학부 교수였던 이태규는 45년 서울대 이공학부장, 46년 7월 조선화학회를 설립하여 불모지였던 한국 화학분야의 기반을 다졌다. 리승기는 애국열사릉에 묻혔고, 이태규는 한국 과학자 가운데 최초로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5]


또한, 도쿄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최응석은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겸 병원장, 북조선보건연맹 위원장을 맡았으며, 같은 대학 공학부를 졸업한 최성세는 북한 국가기술위원회 위원장, 한형기는 김일성종합대학 공학부장을, 이종일은 서울대 교수, 장영철은 건국대 교수를 맡아 국가건설에 참여했다.[6]


일본인 보다 더 일본인처럼


31년의 만주사변부터 45년 패망까지의 시기를 일본은 ‘15년 전쟁’의 시기라고 부른다. 일제는 공식적으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겠다고 공언했으며, 황국신민화 정책과 민족말살 정책이 강력하게 실시되었다. ‘전진병참기지로서의 사명을 가진 반도가 현 시국 아래 이러한 참화(39년의 대가뭄)를 만난 것은 실로 매우 큰 타격이었다.’[7]

조선총독부는 37년 10월 2일 ‘황국신민 서사’를 제정하여 각종 조회, 의식(儀式)에서 반복 낭송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열성적으로 쓰고 외우게 하였다.


<황국신민 서사> (중등학교 이상의 생도 및 일반인용)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 군국(君國)에 보답하자.

2.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굳게 단련하자.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皇道)를 선양하자.[8]


3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는 비합법적인 독립운동은 거의 사라졌고, 합법적 활동으로서 민족개량론(실력양성론)과 자치론이 주류였는데,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던 특정 부류들은 한민족 자체가 사라지고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야말로 반민족 행위를 자행하였다.

당시 친일파 주류는 이광수, 최남선 등으로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일본제국의 일부가 되겠다는 ‘평행제휴론’과 ‘조선 자치’를 주장하였는데, 현영섭과 이영근 등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일본제국주의의 동등한 신민이 되자는 ‘동화일체론’을 주장하였다.

현영섭(玄永燮)은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헌의 아들로 경성제일고보에 다니면서 당시의 유행인 사회주의를 알게 되었고, 31년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상해에 가서는 남화(南華)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면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아무래도 혹독한 고문과 회유로 인해 친일로 전향하였을 것이며 극우 민간단체인 ‘녹기연합’에 가입하여 ‘조선어 전폐론’등의 반민족 활동을 벌였다. 그의 글을 한번 살펴보자.


지나사변에 즈음한 조선인의 총후열성(銃後熱誠)[9]은 아직 충분치 않지만, 이와 같은 행동은 갚음이 되고, 명실공히 황국신민이 되는 길을 앞당기는 일이 될 것이다. 아직 우리는 조건부 일본인이다. 선거권도 없고, 의무교육도 없고, 병역에 나갈 의무도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생활 정도는 낮고, 또 애국심에 있어서 내지인 보다 아직 특별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남의 집에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 바로 금고의 열쇠를 건네받을 리가 없는 것이다. (중략)

나는 꿈꾼다. 반도(半島)의 청년이 대다수 임금과 나라를 위해 기쁘게 죽는 날을! 완전히 일본화된 조선인 중에서 재상(宰相)이 나오는 그 찬란한 날을! 백년 후일까 수백 년 후일까.[10]


조선인들에게는 참정권도, 병역의 의무도, 의무교육도 없슴으로, 목숨으로 충성하는 열렬한 황국신민이 되어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같이 하겠다는 말이다. 일본이 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국민이 특권을 가진 로마시민권같은 권리를 욕망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민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일본인 조차 눈쌀을 찌푸리게 하였다.

현영섭이 38년 7월에 미나미총독을 만나 “조선인이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의식적인 융화 즉, 완전한 내선일체화에서부터 되지 않으면 신도(神道)를 통하여 또는 조선어사용 전폐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라고 하자, 총독은 “한 나라 한 민족의 모어(母語)를 전폐할 수도 없고, 또 조선어를 배척함은 불가하다.”라고 나무랐다.11]

사실 조선인의 초등학교 이상의 학력인구는 12.39%에[12] 불과하여 일본어 가능인구도 그 부근에 머물렀기 때문에, 한국인이 완전한 일본인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경제적 어려움과 열악한 학교보급률 등은 이승만정권이 들어서고 교육기관 보급에 열중한 결과로 인해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을 겨우 충족시키게 되었다.

반면에, 저항운동을 하다가 일제 고등경찰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옥사한 박영출(朴英出)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그는 동래군 기장면 대지주 박인표(광복회 활동)의 아들로 21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장 오다 노부유키가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자, 학생들을 규합하여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무기정학과 퇴학을 당한다.

박영출은 일본으로 넘어가 야마구치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후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하여 반일 정신을 키우고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 들었다. 31년에는 유학생들과 임시 귀국하여 동래 수안동 광장에서 침략전쟁과 식민지 교육정책을 비판하는 시국강연회를 열다가 체포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34년 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관술, 이재유 등과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으로 활동하다 검거되어, 36년에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38년 8월 옥사했다. 77년 건국포장, 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학우들에게 야마구치 고등학교 축구부에서의 활약과 강인한 체력으로 곰으로 불리던 그가 옥사한 것은 열악한 형무소 환경과 고문의 후유증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일본 고등경찰의 수기 모음인 <조선 사상범 검거 실화집>에서 평안북도 경부보 스에나가 하루노리(末永凊憲)는 고문을 견뎌낸 김찬에 대하여 이렇게 탄복하고 있다 ‘종래 다수한 사상범 중 검거 후 45일 만에 자기의 범행에 대하여 전연 개구(開口)한 인물은 타(他)에는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13]


두 엄지손가락을 앞뒤로 묶어 천장에 달아맨 다음 거의 다 죽어가는 사람을 뉘어놓고 콧구멍에 양잿물을 쏟는 것이었으며, 혹은 두 손가락 사이에 막대기를 끼운 다음 손가락 끝을 비끌어 매어 좌우로 훝어 내려가 피부가 멍들고 근육이 떨어져 나가게 했다. … 때때로 의복을 벗겨놓고 철판 마루에 알몸뚱이로 굴리면서 구두 신은 흙발로 사람을 축구공 차듯 하기도 했다. 석탄불에 달군 철봉으로 뼈가 울리게 난타하는 고문은 사람을 생죽음으로 모는 매질이었다.

<야만시대의 기록>2, 1911년 소위‘105인 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은 곽임대의 증언[14]


박영출의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후배 유형식은 <조선인유학생동창회보>39년 4월호에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추모시를 남겼다. ‘친구들이 곰(熊)이라 부른 B형이여/ 그처럼 힘도 세고 맘도 굳세더니/ 벗어진 이마 검은 얼굴로/ 강철 같은 이론을 뿜더니/ 하루아침 비보(悲報)로 옛사람이 될 줄이야!’

[15]




[1]송규진, <통계로 보는 일제강점기 사회경제사>, 2018, 31~35쪽

(1910년의 출생률은13.56%였고 1938년의 출생률은 35.78%였다.)

[2]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2019, 57쪽

[3]송규진, 위의 책, 77쪽

[4]송규진, 위의 책, 176쪽

[5]정종현, 위의 책, 169~175쪽

[6]정종현, 위의 책, 289쪽, 94쪽

[7]조선총독부, <시정30년사>, 박찬승외 3명 역주, 943쪽

[8]위의 책, 1264쪽

[9]후방, 즉 한반도 내에서의 애국활동을 말한다.

[10]김기협, <뉴라이트 비판>, 2008, 121~122쪽

[11]정운현, <친일파는 살아있다>, 2011, 104쪽

[12]송규진, <통계로 보는 일제강점기 사회경제사>, 2018, 351쪽

[13]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2019, 182~185쪽

[14]정운현, <친일파는 살아있다>, 2011, 140쪽

[15]정종현, 위의 책,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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