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또는 온건한 민족주의자들
역사의 여러 장면의 이면에서 우리는, 개인들의 욕망과 그 사회의 현실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다. 유럽의 십자군 원정의 경우에는 가난한 소작농으로 평생을 살아야했던 평민의 차남 이하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출세와 전리품을 통한 부자가 되는 방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1]
상속에서 제외된 서자라고 알려진 아메리카의 발견자 콜럼버스, 같은 서자인 남미의 파괴적 정복자 피사로 등은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기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하였다.
식민지조선에서도 1938년에 처음으로 육군특별지원병 제도가 시행되자, 보통 5~8남매였던 가난한 소작농들의 차남 이하 남성들이 대거 지원하였다. 상속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작은 농지밖에 차지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도 출세욕구와 부자가 되려는 욕망은 존재했다. 게다가 39년에는 미곡수확량이 평균의 54%이상 감소하는 대가뭄이 들어 이 제도는 호구지책이 되었다.[2]
39년에는 모집정원 600명에 지원자 12,348명으로 20대 1의 경쟁률을, 40년에는 3,000명 모집에 84,443명으로 28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급여는 작았지만 이들에게는 2년의 복무기간 뒤에 경찰, 소방권 등의 취업의 기회가 주어졌다.
일제의 권유와 압력, 개인적 필요 등에 의해 38년에서 43년까지 입대한 이들은 태평양전쟁의 전장인 뉴기니, 필리핀, 버마 등의 혹독한 기후와 정글에서 생사의 혈투를 벌여, 입영자 1만 8154명에 전사자 5870명으로 32.3%의 전사율을 기록하였다.[3]
해방 이후에는 또 다른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뛰어난 전투력으로 용맹을 떨쳤고, 대장1명과 중장급 3명(최경록, 송요찬, 함병선) 등 86명의 장성을 배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춘천전투와 낙동강전투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는데, 육군특별지원병 2기 출신인 육군 중령 임원택은 제 6사단 제 7연대장으로 병력 2,500명으로(6사단 9,300명) 소양강변과 봉의산 일대에서 북한 제 2군단(3만 7천명)의 조선의용군 편제의 최정예 2사단(1만 833명)과 격전을 벌여 북한군의 48시간 이내 점령계획을 물리쳤다. 이러한 활약으로 이천, 용인, 수원을 지켜내게되어 국군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4]
조선인들의 지속적인 참정권요구와 황국신민화 정책의 하나였던 육군특별지원병 실시와 맥을 같이하여 식민지조선에는 문화적 민족주의자[5]라고 불리우는 친일부역자들이30~40년대에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지향의 온건파 민족주의자들인 이들은 조선의 자기각성, 문맹퇴치, 산업진흥 사업들을 주도했다. 참정권과 의무교육, 정치적 차별철폐를 요구하는 ‘국민협회’가 대표적인 단체였다. 폭 넓고 다양했던 문화적 활동을 이끈 것은 독립이라는 항구적 목표를 위해 조선 민족을 부강하게 만들려는 실용적인 필요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것은 19세기 말의 애국계몽운동을 상기시키는 점진적인 전략이었다.[6] 그리고 일본군의 장교나 육군특별지원병에 지원한 동기 중에는 무력이 금지된 조선민족의 재무장을 위하여 군사기술을 익히려는 의도를 가진 무리들도 있었다.
국외의 소규모 투쟁집단만이 민족을 위해 살아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다수의 조선민중은 한반도에 거주하였슴으로, 굴욕을 참고 견디며 민족을 위해 일했던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존중은 필요하다. 여기서는 반민특위에 함께 체포되었던 박흥식과 김연수를 살펴 보자.
조선 제일의 부자로 불리던 박흥식(朴興植)은 평안남도에서 소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천부적인 상술을 발휘하며 계속 사업을 확장하여, 1931년에 화신백화점을 설립하였으며, 36년에는 전국에 화신연쇄점 350개 이상을 운영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러한 그의 성공의 이면에는 제 6대 우가키총독과 미나미총독과의 각별한 친교의 도움이 컸다. 한국인들은 은행대출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 그는 식산은행에서 3천만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대부 받은 것이다. 자신의 사업성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은 인물이었다.
반민특위 체포 1호로서 기소장에 나온 그의 죄명은, 반민법 제 4조 (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제 7조 (범죄자 옹호. 도피 협조자) 위반이었다. 그리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임전대책협의회 간부 등의 10여개 이상의 친일단체 활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49년 9월 26일 ‘공민권 정지 2년’의 가벼운 구형에 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7]
무죄이유는1. 피고인의 군수 비행기 공장은 중도에서 정지하여 실질적인 일은 하지 않았고 피동적으로 공장 운영을 맡게 되었으며 2. 임전보국단 등의 간부로 있으면서 실질적인 활약을 한 일이 없고 3. 신문 지상에 발표한 담화는 피동적이었다[8] 4. 안창호 선생에게 많은 원조를 하였고, 광산.상업 등으로 교육사업에 많은 원조를 하였고 5. 해방 후 건국사업에 많은 원조를 하였다는 것이다.[9]
한편, 인촌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는 교토의 제 3고등학교를 거쳐 1921년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유학 11년만에 조선으로 돌아와 형이 설립한 경성방직의 2대 사장이 되었다. 그후 만주의 대형 방직공장, 경성방직, 삼양사 등을 운영하여 기자들이 한국 최초로 그의 가문에 재벌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다.
식민지조선의 사업자로서의 숙명으로 그도 여러 개의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고, 각종 헌금과 학병 권유 등으로 반민특위에 구속되었다. 김연수는 반성의 뜻이 뚜렷하다는 평가와 함께 무죄로 방면되었다. 그 사유는 1. 경제인으로서 민족자본 경성방직을 운영하고 일본 자본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 2. 많은 인재에게 장학금을 주어 민족의 동량으로 키웠다는 점 3. 경방 자본의 표시로 무궁화와 태극기를 나타낸 것, 경성방직의 광목 선전포스터에 태극기를 상표로한 점 등을 거론하였다.{10] 그리고 그의 무죄방면에는 백관수 제헌의원, 현상윤 고려대총장, 김동일 서울대 교수 등의 증인들이 친일단체 등재는 총독부의 강제 임명이었고 교육과 민족기업 육성들에 대한 공로가 크다고 주장하고 탄원서를 제출한 영향이 컸다.[11]
사실 기독교 민족주의자 조만식의 학병 권유 글이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 43년 11월 16일자에 실렸는데, 이 글은 이후에 매일신보 평양지사장 고영한(高永翰)이 날조해 게재한 것이 밝혀졌다. ‘… 해방 후 평양지사에 들렀다가 고 지사장의 자살 소식을 그의 모친으로부터 들었는데 당시 그가 고당 조만식선생의 인터뷰 기사 조작 건으로 많이 자책했다는 애기를 들었다.(김진섭, <매일신보> 평양지사 특파원)’[12]
끝으로 평안북도에서 1901년에 태어나 3.1운동에 가담하였고, 47년 3월 소련군정의 폭력적 통치[13]에 저항하여 월남한 민중운동가 함석헌선생의 글을 살펴보며, 식민지조선을 살아갔던 우리 민족에 대한 친일논쟁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만 두어라, 솔직하자, 너와 내가 다 몰랐느니라, 다 자고 있었느니라, 신사 참배하라면 허리가 부러지게 하고, 성을 고치라면 서로 다투어 가며 하고, 시국강연을 하라면 있는 재주 다 부려서하고, 영국과 미국을 욕하고, 전향을 하라면 참 ‘앗싸리’ 전행을 하고, 곱게만 보일 수 있다면 성경도 고치고 교회당도 팔아먹고, 신용을 얻을 수 있다면 네 발로 기어도 보고 개 소리로 짖어도 보여 준, 이 나라의 지사.사상가.교육자.지식인.문인에, 또 해외에 유랑 몇 십년 이름은 좋아도 서로서로 박사파.선생파.무슨 계.무슨 단, 하와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미국인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세력 다툼이나 하고, 중경.남경에선 중국인의 강낭죽을 얻어 먹으며 자리 싸움을 하던 사람들이 알기는 무엇을 알았단 말인가? 사상은 무슨 사상이고 정치는 무슨 정치 운동을 하였다는 말인가? 이 나라가 해방될 줄을 미리 안 사람은 하나도 없다. 또 설혹 어떻게 해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미리 싸웠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303쪽
[1]백승종, <상속의 역사>, 2018, 117쪽 (게르만문화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장자상속제가 널리 퍼져 있었다.)
[2]정안기, <충성과 반역>, 2020, 100쪽 (42~43년의 지원자 쇄도는 징병 보다 지원병으로 나가서 좋은 대우를 받으려는 요인이 있었다.)
[3]정안기, 위의 책, 366쪽
[4]정안기, 위의 책, 432~435쪽
5]마이클 E.로빈슨의 표현이다.
[6]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2020, 233~234쪽
[7]정운현,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2016, 65~70쪽
[8]반민특위 답변 ‘당시 기자들이 찾아와서 담화 발표를 요구하였을 때 나는 용어도 잘 모르는 말이 많기에 기자들에게 적당히 만들어 내기를 부탁한 것이다.’ (아래의 책, 183쪽)
[9]<해방전후사의 인식>1권, 2004, 186쪽
[10]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2019, 40~46쪽
[11]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2011, 321쪽
[12]정운현, 위의 책, 366~369쪽
[13] <씨알의 소리> 71년 11월호에 함석헌은 소련군의 약탈, 여성들에 대한 폭력 등을 고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