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문학이라는 거짓말
한국의 현재 정치상황은 좌파와 우파가 서로 상대방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며 악마화하는 매우 우려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좌파는 우파를 친일파와 독재세력의 후예로 비난하고, 우파는 좌파를 친일선동 세력과 종북세력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원인으로서 소설 <태백산맥>과 대중 매체의 30년 넘는 지속적인 미군정, 이승만정권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과 악마화가 큰 역할을 하였다. 물론, 그들이 잘못한 부분도 많은 것이 역사적 사실이지만, 북한과 같이 해방과 동시에 소련군정에 의해 정치적 자유를 박탈당한 상황과 비교하면 민족 스스로의 결정에 맡긴 미군정의 자유주의정책과 국제적 통제와 감시 아래 실시한 5.10선거로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의 실정도 한국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정부인 만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악한 존재로만 일방적으로 비방하였던 것이다.
또한, 친일파문제의 해결에 있어서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만큼, 1950년 5월의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반이승만 세력이 두각을 나타내었으로[1] 당시의 국회선출 방식의 대통령선거에서 개혁적인 대통령을 선출하여 다시 처리하면 될 문제였다. 그런데 북한이 외세를 끌어들인 국제전쟁을 일으켜 평화적인 정치를 파괴하고 이승만독재의 길을 열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태백산맥>을 옹호하는 비평가들은 ‘문학은 역사가 아니다’라며 이념적 편향성에 대하여 항변하는데, 한편으로는 다수의 자료와 증언을 통한 ‘역사적 진실’[2]을 형상화했다고하니 독자는 이 작품이 문학적 허구인지 역사적 사실인지 헷갈리게 된다.
심각한 것은 이 책이 수백만권 이상 팔리며 독자들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문화권력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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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조금만 읽어 보아도 객관적 사실과는 무관하게 우파에 대해서는 매우 악한 존재로 규정하여 표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빨치산대장인 염상진에 대해서는 냉철한 지식인이며 고매한 인품을 가진 혁명가로, 반공 청년단 대장인 염상구와 토벌대 대장인 임만수에 대해서는 인격 뿐만 아니라 외모 까지도 매우 추악하게 묘사하고 있다.
-<태백산맥>1권 염상구에 대한 묘사, 251쪽
녹동댁이 마른 버짐 핀 얼굴을 훔치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워쩌겄능가, 나중 당할 때 당허드락도 당장 급헌 불길 꺼야제. 자네도 고 독 오른 눈구녕 봤제? 독새 눈깔이 그럴라등가, 도깨비 외눈깔이 그럴라등가. 시퍼렇게 날 선 백정놈 칼끝으로 찢어논 거맹키로 생긴 눈에 그놈이 퍼런 불 켰다 허먼 지정신이 아닝께. 고때 즈그 아부지가 훈계허로 나서면 지 애비도 찔러죽일 놈이란 말이시. 아까도 눈치 싸게 그러코롬 허지 안 했음사 워찌 됐을지 아능가? 내 떡 함지고, 자네 고구마 소쿠리고 역전 마당에 폴세 패대기 쳤을 것이네. 그리 돼불면 속 씨리고 아픈 것은 누군가?”
-<태백산맥>2권, 임만수에 대한 묘사, 161쪽
남 서장은 물컵을 들며 자조적인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남원장에서 제일 예쁘고 소리 잘한다는 경월이년을 끌어안고 희물거리던 토벌대장 임만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난히 좁은 이마에 곱슬거리는 머리칼은 또 별나게 검었다. 콧잔등이 심하게 꺼져 있어서 콧구멍 부위가 흉할 만큼 커보였고, 움푹 들어간 눈의 흰자위에는 핏기가 서려 있었다. 천기가 흐르는 생김새인데다가 어딘지 모르는 잔인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어제 그를 첫 대면하면서, 네놈도 못된 짓깨나 했겠구나, 하는 것이 남 서장의 느낌이었다.
아니 우파의 인물이라고해서 전형적으로 사악하고 외모까지 추악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해방 당시의 좌파는 정의로웠고, 우파는 흉포한 반민족 세력이었다는 지극히 선악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대표적인 반공청년단인 서북청년회은 당시 한반도의 최고 학력이라고 볼 수 있는 고등보통학교(현재의 중학교)를 대부분 수료한 지식인계층이었다.[3]그들 중에 중산층 이상의 높은 교육열을 가진 북한출신의 기독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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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소설인 <삼국지>에서는 유비와 관우 등을 인(仁)과 충의(忠義)의 화신으로 표현하는데, 민중의 희망과 민족의 정체성을 오랜 세월 응축하여 ‘촉한정통론’이라는 역사관을 예술적 허구로 형상화한 것이다.
‘조조에 대한 역대 학자들의 비난들은 대부분이 거의 사실에 근거하는 일이며 결코 그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씌운 적이 없다. 그런데 어찌 또 판결을 번복한다 할 수가 있겠는가? 문학 예술적인 각도로 보면 ,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된 조조의 형상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성공을 거둔 예술 전형이다. 이렇게 굳어진 전형은 매우 일찍부터 일반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왔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그 위치를 바꿀 방법은 더욱 없다.’[4]
<삼국지연의>가 역사적 인물들을 높은 예술적 성취의 허구로 표현하여 중화민족을 통합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면, <태백산맥>은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 내용들을 다분히 악의적인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몰아가서 오히려 민족을 극단적으로 분열시키고 민족화합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학상의 이미지와 민간의 이미지의 형성도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대체로 후대로 올수록 계보에 의지하지 않고, 주관적 억측과 개인의 취향에 따른 요소가 점점 많아집니다. 물론 근대적인 역사관을 가진 이후는 따로 논해야만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문학 예술작품의 영향력은 역사서를 능가합니다. 장터나 여염집에서 구전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민간의 인사들은 역사학자가 아니므로 엄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없으며 또 누구에게 책임을 질 일도 없기 때문에 자연히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됩니다. 이런 건 원래 흔한 일이고,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죠. 하지만 루쉰 선생이 말한 것처럼 ‘땅위에 길이 없었는데,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길이 되는 법’입니다. 마차가지로 하나의 이미지는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면 가짜 이미지에서 진짜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이중텐, <삼국지 강의>, 41쪽
미군정은 민족의 적이었나
<태백산맥>에서 냉철한 지식인이며 진실된 민족주의자로 등장하는 김범우의 미군정에 대한 정의(定義)는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다르다. 그런데 그가 <태백산맥>의 대표적인 중도적 인물[5]로 그려지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그것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일 위험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김범우는 염상진의 그런 과감하면서 격렬한 행동전개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주의혁명을 추진하는 조직 속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의 행동이 그렇게 전개되고 있는 것은 전체 조직의 통일된 방법이었고, 그런 방법이 동원되기까지는 현실적인 필연성과 당위성이 엄연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군정의 무력탄압에 그 명백한 원인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행위를 ‘폭력’으로 간주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방어적 폭력’이었다. 미군정은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인, 친일파 핵심세력인 한민당의 옹호, 반민족세력인 군.경찰 출신들의 재등용 비호, 공산당 활동 불법화, 청년단 구성과 공산당원들의 무차별 체포와 조직 파괴공작,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폭력행위를 조직적이고 단계적으로 시행해 왔던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남로당은 지하활동 속에서도 수난과 피해로 얼룩진 세월을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차별한 폭력 앞에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또다른 폭력밖에 없는 것이다.
조정래, <태백산맥>1권, 89~90쪽
이러한 진술은 해방전후사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탐구해본 연구자들에겐 ‘조직적이고 단계적으로’라는 미군정에 대한 비판이 소련군정과 남로당에 대한 것이었을 때 오히려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다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하루 아침에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민족의 엄청난 비난에 부딪쳤고, 결국 떨어진 인기에 대한 정치적 승부수로서 46년 10월 대구폭동[6]을 일으켜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여 남한민중들에게 정치적 신망을 잃게된 것이 객관적 진실이다.
10월 폭동에 대한 증언으로 남로당 기관지<해방일보>의 기자, 남로당 핵심간부를 맡았던 박갑동의 글이 있다.
‘앞에서 현지 당부 및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극성스럽게 폭동을 준비했다고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중앙당부의 지령에 의해서 계획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중앙당에서는 각급 세포를 통해 선전 선동에 능숙한 당원을 개인적으로 불러 교육을 시키는 등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고 몇몇 특수공작대원들이 서울근교에서 훈련을 받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래서 깊은 사정을 모르는 하급당원들 사이에도 시험적인 9월 파업이 끝나면 어디서인가 무슨 사태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9월 파업은 공산당이 폭동을 일으키는 전초전으로, 이미 투쟁계획이 세워져 있던 것을 실천에 옮긴데 불과한 것이었다.’[7]
이에 반하여 미군정은 모든 관심과 재정이 유럽과 일본에 집중되어 있어서, 한반도에서는 소련과의 충돌을 최소화하고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이거나 최소한 중도적인 독립정부을 세워주고 하루라도 빨리 철수하고 싶어했다. 소련의 지나친 간섭과 재빠른 위성국가 건설의 시도와 비교하여 미군정이 비난 받아야 한다면 지나친 재정의 부족과 한반도 지배욕망의 부족이 해당될 것이다.
‘전쟁성의 핵심 고위층 대부분이 그렇듯이 오늘 아침에 만난 노체 전쟁성 차관보 역시 한국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노체 장군은 후버 자문역의 조언을 인용하면서 미국은 단 두 군데 지역의 문제, 하나는 독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노체 장군은 우리가 전 세계의 재건을 위해 재원을 넓고 얕게 깔아버린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관은 그 같은 주장이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권리를 지키기위해 군화끈을 졸라매고 한국과 오스트리아에 주둔 중인 미군 병력에게는 불공정하다고 말했습니다.’[8]
한편, 최근 한국에서는 미군정이 해방군이었는가 아니면 점령군이었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사실 이 논쟁은 무의미한 것인데, 한국은 자신의 힘으로 독립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많은 국내외 인원들이 일본제국의 편에서 참전 또는 부역하였으니,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점령군 역할과 해방군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양 군정의 실태를 살펴보면, 미군정은 사소한 미군병사들의 일탈행위가 있었지만 심각한 수준의 약탈은 없었으나, 소련군정은 46년 말까지 큰 규모의 약탈, 폭력행위가 병사 개인과 소련군정 당국에 의해 자행되었다.
병사들 개인의 자질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소련군의 주력은 유럽에 있었고 극동 전선에는 병력이 부족하여 소련 각지의 죄인들을 석방하여 보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잡범 출신의 소련군인들이 소련군정의 점령군 행세에 동참하여, 귀중품 약탈, 살인, 강간 등 수많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45년 9월 6일 사령부의 금지령이 떨어진 이후에도 범죄행위로 사형 당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소련군의 약탈행위는 악명이 높은데, 동유럽에서 그리고 일제가 대규모 중화학공업을 건설한 만주에서 엄청난 규모로 기계설비를 뜯어갔으며, 만주에서 가져간 장비들에 의해 소련의 공업이 크게 성장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소련은 중화학공업이 발전한 북한에서도 자연스럽게 함흥, 원산, 진남포, 청진 등지의 대규모 공장에서 공작기계, 방직기계, 전동기 등을 가져갔다. 또한, 아시아 최고 규모라는 압록강의 수풍발전소에서도 10만 kw 발전기 3대도 실어갔다.
쌀과 가축, 귀금속도 대량으로 가져갔는데 45년에 244만섬, 46년에 290만섬 그리고 45년에 소 15만 마리, 말 3만 마리, 돼지 5만 마리를 반출했다. 그리고 금 1.5톤과 은 5톤을 함유한 4,261톤의 금속 혼합물, 1,550톤의 형석, 454톤의 흑연정광 등을 소련으로 가져갔다.[9] 이 정도만 파악하더라도 소련군이 해방군인지 점령군인지는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물러간 땅에 소련 군대의 횡포가 이어졌다. 길거리 아무데서나 따발총을 들이대며 시계를 빼앗는 것은 물론, 부녀자를 겁탈하고 마을 양곡창고에 쌓인 쌀가마를 흥남 항구로 실어날랐다. 우리가 농사 지은 쌀을 아마도 소련으로 실어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일제 말기의 어려운 시절에도 근근히 이어지던 식량 배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10]
한편, 미군정에서는 다른 성격의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했다. 자유주의 국가의 나라답게 통제경제를 시행하지 않고,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한 것이 문제였는데 식민지조선에서 공동체정신에 대하여 전혀 학습한 적이 없는 조선의 지주들은 쌀을 매점매석하여 시장에 내놓지 않아 쌀값이 2개월만에 8배나 상승한 것이다.
당황한 미군정이 뒤늦게 수매에 나섰지만 시중가격과 많은 차이가 났기 때문에,지주들과 소작인들의 강한 저항을 받았고 좌파들의 주요 공격대상이 되어 미군정의 대표 실정으로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11]
한국에 배정된 턱 없이 부족한 재정은 미군정 군정요원의 심각한 부족[12]을 야기했고
, 좌파에 의해 가중되는 치안불안과 행정공백을 해결하기위해 식민지시대의 경찰, 관리를 대거 기용함으로써 친일파를 옹호했다는 불명예를 영원히 가져가게 되었다.
미국은 46년 까지는 소련과의 협상에 중심을 두어 재정을 소규모로 투입하였고, 47년과 48년에 국가건설을 위해 집중적으로 재정을 투입하였다. 실제로 46년 10월의 미군정 인력(미국인과 한국인)은 52,670명이었는데, 47년 11월에는 153,670명으로 3배 급증하였다. 그리고 대한 원조의 규모도 46년 4천5백만 달러에서, 47년에는 2억4배만 달러로 4배 이상 증가하였다.[13]
또한, 남북한의 급여수준을 비교하면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45년 9월 당시 한국 경찰의 월급은 3달러에 불과했지만 46년 1월 소련군정 아래의 번역원 급여는 약 40달러로 환산된다. 그리고 북한의 위관급 장교들은 소위가 약 260달러를 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졌다.[14]
남쪽의 재정이 이렇게 열악했기 때문에, 경찰과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민중들의 원성을 사고 좌파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유럽재건에 몰두하고 있었던 미국에게, 한국은 미국의 체면을 구기지않고 최대한 재정투입을 줄이면서 품위있게 철수 하는 것이 목표된 지역이었다.
-주한 군정장관 러치 소장이 47년 7월 워싱턴 출장중에 하지 사령관에게 보낸 보고
(중략)
군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은 미국의 골칫거리입니다. 무역과 통상에 관련해서 앞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미국이 한국인들에게 혜택을 요구하며 사정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본인은 가끔 사령관에게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이기적인 국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공산주의로 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소련이 한국을 넘겨받는다고 해도 그들은 현재보다 훨씬 더 큰 짐을 떠안게 될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민주자결의 희망이 없는 한 어느 누구와도 협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제가 제안한 계획[15]은 한국인들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점령군에게 가해오는 압박을 벗게 하며 돈을 들이고도 짐을 떠맡는 부담도 덜 수 있게 해줍니다.
그 대신 미국이 명예롭게 빠져나오는 길을 제공할 것입니다.[16]
[1]여기에 대해서는 유동성이 강했던 무소속의원들 상당수가 친이승만계였다는 주장이 있다. 김일영
, <건국과 부국>, 2010, 121~127
[2]권영민, <태백산맥 다시 읽기>, 1996, 273쪽
[3]이영석, <건국전쟁>, 2018, 271쪽
[4]심백준, <다르게 읽는 삼국지이야기>, 2001, 24쪽
[5]김범수는 작품의 후반부인6.25전쟁의 시기에 미군의 횡포에 반발하여 인민군에 자원 입대한다.
[6] 10월 폭동의 기원에 대하여, 만주에서의 중국공산군 대패에 대한 스탈린의 복수를 위한 지령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어쨌든 직전에 평양을 방문했던 박헌영이 소련군정의 허락없이 벌일 수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
[7]박갑동, <박헌영>, 1988, 152쪽
[8] 1947년 7월 2일 워싱턴을 방문한 주한 군정장관 리치 소장과 전쟁성 차관보와의 대화. 김택곤,
<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1945-1950>, 2021, 259~261쪽
[9]안문석, <북한 현대사 산책>, 2016, 25~27쪽
[10]북한에서 평양사범대학(현재 김형직사범대학) 교수로 있다가 92년 남한에 망명한 김현식의 증언
. 위의 책, 92쪽
[11]김원, <젊은 대한민국사: 건국>, 2015, 320쪽
[12] 45년 10월의 군정요원(전술군과 군정요원)은 77,643명이었는데, 46년 10월에는 37,918명으로 급감하였다. 이택선,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2020, 51쪽
[13]이택선, 위의 책, 62쪽
[14]이택선, 위의 책, 111쪽
[15]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치 소장은 47년 9월 1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6]김택곤, <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1945-1950>, 2021, 278~2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