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조선의 혼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평가하기에 앞서, 명과 청의 최초의 전면전이었던 심하(深河)전투에 대하여 그 전개상황을 알아보자.
명과 심복 이이첨 등의 거듭된 출병요청에도 광해군은, 왜란 이후의 열악한 경제사정과 나약한 군사력 등의 이유를 들어 원병을 거부하다가 1619년 2월 마침내 깅홍립이 이끄는 조총병 5천명을 포함한 1만 3천명의 대군을 파견하게 된다.
그런데 전투의 비참한 결말은 도원수 강홍립의 자질에서 벌써 시작 되었다. 매우 위험하고 명나라 군대와의 원활한 협력을 위해 임진왜란을 경험한 백전노장을 기용함이 마땅하였으나, 문관이며 국왕 직속 통역관인 어전통사(御前通使) 출신의 강홍립을 암명한 것이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적과의 소통 또는 내통을 중심에 두었다는 것은 광해군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노력하라.”[1]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려면 강력한 지휘력이 있는 장수가 갔어야하며, 청의 막강한 철기군을 막아내려면 명군과의 빈틈없는 협조가 있어야 했다.
모든 것이 어긋난 상태에서의 전투는 명과 조선 군사들의 처참한 패배였다.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던 명의 총병 유정(劉綎)은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의 위장전술에 속아 격렬한 전투 끝에 화약포 위에 불을 붙여 다른 장수들과 함께 자폭하였으며, 조선군은 9천명이라는 엄청난 전사자를 내고 항복하고 말았다.
명의 군대가 가장 믿었고 청나라의 기병들을 두렵게한, 조선이 자랑하던 조총부대의 씁쓸한 최후였다. 질 수 밖에 없는 전투였나 아니면 피해를 줄일 수는 없었는가? 강홍립이 심하전투 후에 올린 장계를 통해 그 때의 정황를 알아보자.
“신이 배동관령에 도착해 먼저 후금의 역관(胡譯) 하서국(河瑞國)을 보내어 후금에게 비밀리에 알리기를, ‘비록 명나라에게 재촉을 당해 여기까지 오기는 했으나 항상 진지의 후면에 있어서 접전(接戰)하지 않을 계획이다.’고 했기 때문에 전투에 패한 후에도 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일 화친이 속히 이루어진다면 신들은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2]
정말 놀라운 기록이다. 전투에 임하기도 전에 내통하여, 싸우지 않겠다고하니 어찌 이길 수 있었겠는가! 청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조총부대가 이러했으니, 철기군은 마음껏 명군과 조선군을 유린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후 청에서 온 국서의 내용도 광해군과 강홍립의 전쟁에 대한 무의지와 양국간의 교감을 분명히 보여준다.
너희 조선이 군대를 일으켜 명을 도와 우리를 친 것에 대해, 우리는 너희가 이번에 온 것은 조선 군대가 원하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바로 명나라 사람들에게 압박을 받아, 일본의 침략 때 너희를 구한 은덕을 갚기 위해 왔을 뿐이리라. …… 이 넓은 천하에 없어야 할 나라가 있겠는가. 어찌 큰 나라만 남고 작은 나라는 모두 멸망해야 하겠는가. 조선의 국왕 너는 우리 두 나라가 평소 원한이나 틈이 없었으니 지금 우리 두 나라가 함께 모의해 명에 대해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이미 명나라를 도왔으니 차마 명을 배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너의 대답을 듣고 싶다.[3]
심하전투의 내용은 마치 일본 전국시대의 세키가하라전투를 연상하게 한다. 그 당시에도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각각 10만 병력으로 맞붙었는데, 도쿠가와와 내통하고 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배반하여 전투는 동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兩 國 敗 亡 之 王
1930년대 일본제국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29년 발생한 미국 경제대공황으로 본국의 경제상황은 악화되었고, 식민지조선의 통치는 조선인들의 참정권을 비롯한 여러 권리요구가 쏟아지며 새로운 전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31년에 관동군 장교들이 도쿄 중앙정부의 허락없이 일으킨 만주사변은, 그것이 비록 침략행위였지만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에겐 경제난과 정치적 불만을 해소할 신천지 같은 기회였다.
인구압박과 자연재해로 굶주리던 식민지조선인들은 만주는 원래 조선인들의 땅이었으니, 개척자로 진출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일본제국의 부추김에 가난한 농민, 사업가, 군인, 사회 불만세력들 수십만명이 이제는 제국주의의 선봉장이 되어 만주로 달려갔다.
일본 본토와 식민지조선에서는 좋은 일자리를 얻기가 매우 어려웠던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한국인들이 만주에서 고위 관료가 되었다.[4] 만주국에서 근무한 조선인 관료는 대략 3,000명 정도로 추산되며, 고등관(현재의 사무관) 이상의 조선인은
200명 안팍이다. 강영훈 국무총리와 민기식 육군참모총장 등은 만주 건국대학 출신이었다.[5]
중국인 폭력배에게 둘러싸인 간도 지방의 조선인들이라는 이미지는 조선인들이 만주의 원래 주민이며 통치자였다는 고토(古土)수복주의적 주장에 의해 더 선명해졌다.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1868~1933)가 만주국 건국 직전에 경성을 방문했을 때, 조병상과 조선인 실업가들이 그에게 ‘만주로 간 1백만 조선인 동포들’을 보호해달라고 간청했다. 조선인 정착민들에게 내면화된 이 선구자 이미지는 북쪽 국경선 너머로 향한 조선 민족의 확장이라는 디아스포라적 전망의 암묵적 반복이었다. 그것은 19세기 말 신채호(申采浩)같은 조선인 학자들과 일본인 만선사(滿鮮史, 만주.조선사) 연구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정치적 목표는 다양하게 갈렸지만, 그 두 집단의 연구자들은 모두 ‘만주와 조선은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들은 고대 왕국이었던 고구려의 영토경계가 만주를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들의 간도로의 이주는 “조상의 옛 땅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우치다준, <제국의 브로커들>, 426쪽
이러한 만주열풍의 시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만주침략을 정당화하고 만주와 조선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른바 ‘만선사(滿鮮史)’를 탄생시켰는데,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이나바 이와키치( 稲葉岩吉)였다. 그는 일본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중국 화북(華北)에서 유학하였으며, 1909년부터 7년간 만철(滿鐵)역사지리조사실에서 만주의 지리,역사를 연구하였다.
1916년 이후에는 일본의 고등학교와 육군대학교에서 동양사를 강의했으며 <청조전사>, <만주발달사>를 저술했다. 그리고 1922년, 그의 스승인 나이토 고난의 추천으로 한국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왔고,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자 수사관(修史官)으로 임명되어 <조선사>편찬을 총괄했다.[6]
이나바 역시 일본 중심의 식민사관을 펼쳤는데, 조선반도는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만주와 분리 되었으며 중국의 유교문명을 심도 높게 받아들여 수백년간의 평화는 얻었지만, 사회 각 방면에 변화가 사라진 정체된 땅으로 아시아에서 최고로 낙후되었다는 비평이었다.[7]
이나바는 이러한 만선사 연구의 하나로 1932년 6월 교토제국대학에서 ‘광해군 시대의 만선관계’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조선사편수회에 있으면서 <광해군일기>를 열람할 수 있었고, 조선인 수사관인 홍희(洪憙, 18884~1935)의 해석상의 도움을 받아 작성하였다.
4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의 이 책은 이듬해 같은 제목으로 서울에서도 책이 출간되었는데, 광해군을 두 강대국인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쳐 백성들에게 혜택을 준 ‘택민주의자(澤民主義者)로 높게 평가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8]
그런데, 조선시대와 대한민국 초기에 모두 광해군은 어리석은 임금 즉, 혼군(昏君)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함석헌선생은 적극적인 자세로 시대정신에 맞게 만주로 힘차게 나아가지 못한 것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라도 한번 뜻만 있다면 시험해 볼 때요,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어부의 이(利)를 취할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만주에 대한 발언권이라도 가졌을 것이다. 명나라는 이 싸움에 우리더러도 응원을 하라고 하였다. 임진란 때의 신세도 있으니 의리상 응원하기도 해야겠지만, 이 때에 한번 독자의 국책을 못 세워 볼까? 그러나 그 용기가 없었다. 겨우 2만명을 보내는 데 그치었으니 소극도 이런 소극 정책이 어디 있을까? 또 그나마도 거느리고 간 강홍립, 김경서도 그 인물이 아니어서 한낱 남의 이용물만 되고 말았고, 조정이란 것은 아무 생각없이 그저 썩어진 옛 투대로 명.청 사이에 그 어디에 가 붙는 것이 유리할까 그것만을 가리려 하고 있었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251쪽
이러한 수백년의 역사적 전통을 깨고 재해석하기 시작한 것이 이나바였고, 이후 이나바의 지도를 받은 홍희(洪憙)의 ‘폐주광해군론’에서 다시 강화되었으며, 북한의 <조선전사>[9]에서, 1959년 이병도의 ‘광해군의 대 후금 정책’이란 논문에서 중립외교정책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 수십년 동안 영화 <광해군>, TV드라마<화정>, 다큐멘터리등에 지속적으로, 별다른 반대 없이 주장되어 광해군은 어느새 ‘탁월한 외교정책을 벌인 개혁군주’로 대중들에게 각인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정말 이러한 재평가가 올바른 역사적 해석일까? 여기서는 그 당시의 시대정신과 광해군의 정치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1]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2012, 339쪽
[2]오항녕, <조선의 힘>, 2010, 221쪽
[3]오항녕, 위의 책, 222쪽
[4]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231~232쪽
[5]김용삼, <김일성 신화의 진실>, 799쪽
[6]정상우, <만선사, 그 형성과 지속>, 2022, 118쪽
[7]정상우, 위의 책, 143~147쪽
[8]한명기, <광해군>, 27~28쪽
[9] ‘광해군과 정부 안의 일부 관리들은 명나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그에 치우치지도 말며 녀진을 홀대하지도 말고 그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입장을 취할 것을 주장했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정세를 어느 정도 옳게 인식한데서 나온 주장이었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79, 오항녕, <조선의 힘>, 200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