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통사관, 남한의 농지개혁 실패로 몰아가기

대한정통론 제5장(2편)

by 현진석

남한정부의 농지개혁 실패로 몰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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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에서 이승만정권을 비난하는 내용의 핵심 중의 하나는 49년과 50년 봄 사이에 시행된 농지개혁에 대한 것이다. 별다른 개혁도 이루지 못했고, 지주들의 사전 토지매매로 인해 농민들이 큰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1]


그들이 이번에 계획하는 것은 전과 다른 방법이었다. 관을 상대로 지주들의 불법행위를 고발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이 이쪽만 각기 소작인별로 뭉쳐 지주 집으로 직접 치고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작년 하반기에 실시한 농가실태조사라는 것이 농지개혁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갇혀 있는 동안에 알게되어 그들의 분노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농가실태조사를 해간 그대로 자기들이 소작하고 있는 논이 농지개혁을 통해 분배되리라 믿었던 것이고, 읍사무소 직원이나 이장도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주들의 논 빼돌리기를 읍사무소에서 막아달라고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참고조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농가실태조사가 그러한 오해유발을 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 무관성을 홍보하라는 지시가 뒤따랐지만 좌익문제에 정신을 팔고 있던 군에서부터 그 문제를 소홀히 지나치게 되어 줄줄이 그냥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태백산맥>6권, 187쪽


그런데 이 문제는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지주들이 전혀 유리한 상황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미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실시되었고 남한에서도 곧 토지개혁이 시작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토지가격은 폭락했고 오히려 지주들이 간청하고 회유하여야 겨우 좋은 논밭을 팔 수 있는 소작인들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장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충청남도 서산군 근흥면 두야리(斗也里) 한철수(韓喆洙) 씨의 증언이다.

‘한철수씨는 지주 백남식.남찬 형제의 논 11마지기를 소작 부치고 있었는데 그중 9마지기(1,718평)를 1948년 헐값에 구입했다. “당시 시세의 반값에도 미치지 못했다. 상답의 시세가 예를 들어 1천원이었다면 백남식의 소작지는 상답에 600원, 중답에 450원, 하답이면 250원에서 200원에 매각되었다. 2마지기마저 사기에는 부담이 되어서 남에게 팔아 9마지기를 사는데 보탰다. 지주는 안 사면 내놓으라 했지만 워낙 헐했으니 누구나 왔다. 이렇게 헐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지주가 빨리 한꺼번에 팔아치우려고 했기 때문에, 지주뿐만 아니라 소작인도 분배 있을 줄 다 알고 있었고 분배되는 것보다 헐한 조건으로 팔테니 사라고 했던 것이다. 사실 분배받은 것 보다 훨씬 유리했다.’[2]

현실이 이러했기 때문에 48년 3월에 미군정이 실시한 일본인 소유 농지의 분배에 있어서도(전체 농지의 12.3%), 자소작농이나 소작농에게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농지위원회의 구성과 활동도 전체적으로는 농민의 이익을 보호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里)농지위원들은 소작이나 소자작농이 많았고 지주들의 이익 보다는 동네 농민들 편에서 활동했으며, 면농지위원 역시 규정대로 구성되었고 중소지주 보호를 위해 활동하였을뿐 대지주.부재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3]

이렇게 진행된 남한의 농지개혁은 6.25전쟁 발발 불과 몇 개월 전인 1950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전체 농지의 70~80%의 분배가 이루어져서 자기 농토를 가지게된 남한의 대다수 민중이었던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북한군에 맞써 싸우는 결과를 낳았다.

농지개혁법은 49년 6월 21일에 공포되고, 곧 개정 작업에 들어가 50년 3월 10일에 최종안이 공포되었다. 하지만, 봄 파종에 맞추어 토지소유를 명확하게 하기위해 49년부터 준비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명운을 건 토지분배가 전쟁전에 기적적으로 완료되었던 것이다.[4]


재야운동가 주대환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성공을 열망한 자영농들이 피땀흘려 발전시키고 자식들을 대학 보내 교육시킨 덕분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이것은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 성공의 비밀의 하나로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두 평등한 단계에서 자신들의 성공욕구를 위해 최선을 다한 덕분이라고 설명한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소작농이 모두 자영농으로서 새 나라의 국민이 됩니다. 완전한 새 출발이지요. 그 사람 입장에서 대한민국을 바라보십시오. 대한민국이 ‘나의 나라’예요.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영농의 나라로 건국되었습니다. 1950년대의 농민들은 문맹률이 높고, 그래서 흔히 말하듯이 민도(民度)가 낮았다고 합니다. 한글도 잘 모르고 해서 아무나 찍었다, 아니면 막걸리와 고무신을 받고 아무에게나 투표했다., 이러는데 제가 보기에는 자기 이익에 매우 충실하게 아주 정확하게 찍었어요. 매 순간순간마다, 1948년의 제헌국회의원 선거와 1950년의 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보면 당시의 국민들이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52년과 1956년의 대통령 선거, 그리고 1963년의 대통령 선거 결과도 대단합니다. 저는 자영농을 비롯한 당시의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당당한 주인으로서 주권을 행사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한 것입니다.

주대환,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 33쪽


[1]이러한 비난과 부정확한 분석에 의한 개혁부정은 <해방전후사의 인식>1권에서도 동일하다.

유인호, ‘해방 후 농지개혁의 전개 과정과 성격’

[2]장상환, ‘농지개혁과정에 관한 실증적 연구’, <해방전후사의 인식>2권, 358쪽

[3]장상환, 위의 책, 390쪽

[4]김일영, <건국과 부국>, 117~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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