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통사관- 아, 홍이포!

대한정통론 제6장(2편)

by 현진석

사실 광해군이 국방문제를 전혀 신경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화포를 제조하기위한 화기도감을 설치하였고 화약재료인 염초를 개발, 확보하기위한 노력도 지속하였다. 후금이 거점을 통과하여 한성을 바로 공격하는 경우를 위한 방책도 마련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재정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왕위에 오르기전에 명나라의 세자책봉 승인 거절, 경쟁자였던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음, 인목대비 유폐 등으로 왕권강화에 대한 유별난 집착으로 궁궐건설에 너무나 많은 재정을 투입하여 국방강화가 부실해졌던 것이다.

명나라는 자국의 황태자 책봉이 아직 완료되지 않아, 차남이었던 광해군의 승인을 계속 미룬 것인데 1592년부터 1604년까지 13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나 북경에 책봉 주청사를 보냈으나 번번히 거절 당했다.[1]

그렇지 않아도 선조에게 견제를 받고 있던 광해군은 피말리는 심정이었을 것이며

, 1606년 적장자 영창대군의 출생으로 심한 정신적 압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광해군에게 반명감정을 키우게했고, 왕권을 강화하기위해 점술과 풍수를 동원하여 대규모의 궁궐건축에 매달리게 하였다.

선조 때에 시작한 창덕궁 중건을 비롯하여, 규모는 작으나 칸수가 경복궁의 10배나 되는 인경궁, 경덕궁을 잇따라 건축하였다. 재정을 충당하기위해 4결당 1필을 거두던 결포를 1결당 1필씩 거두는 100% 인상을 추진하였으며, 심지어 군량미까지 손을 대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후금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광해군 11년, 곡식사정을 묻는 광해군에게 비변사는 “소모장이 둔전(屯田)에서 거둔 곡식은 군량에 관계된 것이니, 마땅히 해마다 수량을 조회하여 쌓아두고 불시의 수용에 대비해야 합니다……지금 영건(營建)의 재용이 떨어지려하니, 부지런히 주선하여 보충할 방법에 대해 의당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 진의 1년 종자와 식량으로 사용할 것은 제외하고 그 나머지를 적당히 헤아려 거두어 모아 즉시 올려 보내게 해야 할 듯합니다.”라고 보고했다. 또한 강화도 훈련도감의 군량미 9천석 중에 5천석을 궁궐공사에 사용하였다.[2]


아, 홍이포!


홍이포.jpg

1637년 1월 24일 남한산성에는 청군이 망월봉에 설치한 홍이포로부터 굉음과 함께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탄은 행궁의 천장을 뚫었으며 성곽 곳곳을 무너뜨렸고, 산성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홍이포(紅夷砲)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으로 수입된 화포로, 포신이 길어 당대 최고의 사정거리를 자랑하는 막강한 무기였으며 1621년에는 명나라에서도 자체 제작하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17세기 최강의 화포제작자가 임진왜란을 통해 많은 기술을 축척한 조선이 아니라, 오랑캐라 멸시하던 청나라였다는 것이다. 청은 누르하치가 1626년 1월 영원성을 지키던 명나라의 원숭환부대가 쏜 홍이포에 부상을 입고 그해 8월 사망하면서, 절치부심하여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과 장인들을 포섭하여 1631년에는 자체 제작에 성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광해군의 재정낭비, 이괄의 난, 소극적 외교정책 등의 영향으로 백년 뒤인 영조대에 겨우 제작에 성공하게 된다.

광해군 6년의 기록을 보면, 궁궐공사를 위해 3개월 동안 정철(精鐵) 10만 근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무기를 담당하던 군기시 (軍器寺)에서 1년 동안 거두는 공철(貢鐵)이 1만 근이었으니 3개월만에 국방자원 10배를 낭비한 셈이 된다.[3]

물론, 전쟁에서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의 민중과 지식인들은 예로부터 ‘의로운 민족’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었으니, 실패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아시아의 민중들은 <삼국지>, <임경업전>을 통해 자신들의 염원을 투영한

승리의 역사로 기억하고 싶어했다.


세번째로 설명해야 할 개념은 ‘의로움Righteous’이다.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의로움은 도덕적 적합성, 충성심, 원리에 대한 충실함을 의미한다. 의로움의 개념을 한반도(혹은 한반도의 정치)에 적용할 때 이는 대부분의 한반도인이 특별히 더 의롭다거나, 의로움에 더 사로잡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한국의 역사에서 의로움이 궁극적으로 좋은 가치로 선언되거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억압적인 정권에 대항하는 기치로 소환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590년대 일본의 점령에 대항한 조선인 군대와, 한 세대 이후 만주족의 조선 침공에 대항했던 조선인 군대는 모두 ‘의병(義兵)’으로 불렸고, 이는 20세기 초의 식민지화에 대항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4]


한국인들에게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은 익숙하다. 여기에 필자는 병자호란에 대하여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이용하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

처음부터 후금이 명나라를 압도한 것이 아니었고, 청에는 요동경략 원숭환과 오삼계 같은 영웅호걸들이 조선에는 천자총통, 신기전 등의 뛰어난 화포기술과 이괄, 임경업 등의 맹장들과 임진왜란을 경험한 백전노장들이 있었는데도, 적극적인 군사작전과 외교를 외면하여 결국 반정으로 쫓겨나고 인조는 또 다시 정권의 정통성에 매달리게 되어 수십년을 낭비하여 새로운 화포의 제작도 청의 철기군을 방어할 강력한 방어선과 군사, 장성(長城)도 없이 호란(湖亂)을 맞아 굴욕적으로 항복하게 되었던 것이다.[5]


[1]한명기, <광해군>, 72쪽

[2]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2012, 302쪽

[3]오항녕, 위의 책, 293쪽

[4]예일대 사학과 교수인 오드 아르네는 한반도가 수천년 동안 독자적 국가를 유지한 원인으로 정체성의 유지와 의로움의 숭상을 들었다. 오드 아르네 베스타, <제국과 의로운 민족>, 2022, 42쪽

[5]병자호란과 비교하여 도덕적, 정치적 평가를 논외로 한다면, 박정희의 매우 적극적인 월남파병은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라는 위태로운 안보적 위기와 혈맹으로서 거절할 수 없었던 60~70년대의 시대상황에 적절히 대처한 경우라 하겠다. 한일 외교정상화로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이 모두 8억 달러였는데,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 정부는 ‘브라운 각서'를 통해 한국국 장비 현대화를 약속받았고, 65년부터 72년까지 군인과 기술자들이 총 10억2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keyword
이전 12화대한정통론, 제6장 조선의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