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두개의 실패한 전쟁, 1949
공산당 문건인 <인민人民 >(1950.08)에는 남파된 공산유격대의 49년 4월부터 11월까지의 전과에 대하여, 남로당 부위원장이었던 이기석(李基錫)이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연동원 인원: 37만 6천 4백 1명
교전회수: 6천 7백 68회
사살: 1만 1백 3명
각종 무기 약탈: 31만 1천 7백 8발[1]’
물론 이러한 전과는 터무니없는 과장이지만, 49년의 공산유격대가 얼마나 격렬하게 남한사회를 파괴하려고 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박헌영이 주도한 강동정치학원에서 남파된 인원들로 그의 20만 봉기설의 기원이었지만, 49년 동계 토벌작전으로 대부분 파괴되어 6.25전쟁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국방부에 의하면, 공산유격대는 48년 말부터 모두 10차례에 걸쳐 2,300여명을 남파시켰고, 이들은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 이후 산으로 도주한 좌익 유격대 2,000여명과 합세해 각지에서 치열한 파괴활동을 벌였다. 50년 6.25전까지 남한 내에서 활동하던 무장 좌익세력은 약 6,620명에 달했다.[2]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군병력은 여유가 있었지만 무기체계에서는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미국에 최신 중화기를 1949년에 지속적으로 요청하는 국방원조 전쟁을 벌였고, 북의 박헌영은 남쪽의 지지기반을 벗어나 김일성의 식객처럼 머물고있는 처지여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위해 남로당 출신들을 대거 공산유격대로 남파하는 게릴라 전쟁을 전개하였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이승만은 북한의 군사력과 남침야욕을 높게 평가하고, 방어적인 무기라도 지원 받기를 계속 요청하였지만, 미국정치권은 그의 ‘북진통일론’과 반미주의자로 간주되는 그의 평판에 영향을 받아 번번히 거부되었다. ‘우리는 자주 방위가 가능할 정도의 무기를 신청하였소. “적절한”채널을 통해 무더기로 요청했지만 얻은 것은 거의 없소. 38선 너머의 저쪽에서는 사거리가 긴 소총으로 우리에게 사격할 수 있지만, 그런 소총을 갖고 있지 못한 우리 경찰은 여기에 속수무책이오. 우리 군대는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38선 주의에 주둔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소.’[3]
38선에서의 수백차례가 넘는 남북간의 교전과 이승만의 일견 무모해 보이는 북진통일 주장, 미국의 강력한 북침반대 속에 1950년 전쟁 직전 남한군대가 보유한 장비는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50년 3월 8일 이승만이 35살이나 어린 그의 정치고문 올리버박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국가예산의 대부분을 미국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한국이 국방원조를 위한 투쟁에서 완전히 패배하였슴을 분명히 보여준다.
서울 북쪽의 적이 어느 순간에라도 우리가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무기와, 더 많은 모든 것들을 가지고 휩쓸고 내려올 수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올리버박사가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입장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우리는 현재 대공포도 없고 하늘에 띄울 수 있는 비행기도 없고, 탄약조차 없소. 현재의 군사원조 프로그램은 탄약과 예비품과 장비가 계속 작동되는데 필요한 그 밖의 사소한 품목들만 제공할 뿐이오. 내가 “사소한” 품목이라고 한 이유는 이들은 작은 부품들에 불과하고 전부 모아봐야 아무것도 만들 수 없기 때문이오. 이러한 품목들의 비용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싸지만, 이들은 우리의 대공방어와 해안방어에 아무것도 보태주는 것이 없소. 지금까지 모스크바에서 북한에게 남한을 침공하라는 “청색”신호를 보내지 읺은 것은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겠다고 하는 한국인들의 결의와 공산당을 막겠다는 나의 확고한 입장 때문이오. 저들은 시종일관 우리보다 사거리가 긴 포와 소총을 갖추고 있소. 소련은 한국이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인들이 철수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 공격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소.(중략)[4]
그렇다면 ‘외교의 천재’라고 불리던 이승만은 미국이 남한의 모험주의적 전쟁을 매우 우려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계속 ‘북진통일론’을 고수한 것일까?
여기에 대한 우파의 해석은 첫째,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인 월남 반공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 둘째, 북한의 남침야욕 ‘국토완정론’에 대한 강경한 대처 셋째, 무소속 의원들의 평화협상에 대한 정치적 대응 넷째, 군사장비를 획득하기위한 대미협상용 등이 있다.[5]
모두 정치적으로 가능한 해석들이지만, 미국이 대만의 장개석과 이승만의 북한, 만주공격에 대해서 계속 경계를 하고 있었고, 주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장군의 북한 공격시의 모든 지원중단이라는 성명과 애치스라인을 통해 1차 방위선에서 대만과 한국을 제외함으로써 분명한 경고를 주었슴으로 정책변화가 시급하였다.
‘평화유지’를 위한 방어적 무기를 요청하며 북한의 남침야욕을 고발하는 성명을 특별히 내외에 선언했다면, 원활한 국방원조를 받아내고 탱크를 육탄으로 막아냈다는 위험천만한 무용담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기 싫어하는 이승만의 고집스러운 반공투사적 성격과 애국심에 불타는 노련한 군인들과 2만정의 소총만 있으면 북한을 평정할 수 있다는 일본군 출신 1사단장 김석원[6]
등의 북한에 대한 자신감 등이 결국, 미국에게 한국은 상당한 수준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왔던 것이다.
[1]김남식, <남로당 연구>, 1984, 425쪽
[2]이택선,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163쪽
[3]로버트T.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상권, 한준석 옮김, 359쪽
[4]로버트T. 올리버, 위의 책 하권, 428~429쪽
[5]김일영, <건국과 부국>, 98쪽 참조
[6]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2018, 204쪽